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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로운 삶의 방식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강론)
   2016/08/17  16:55

성모승천대축일 


2016. 08. 15. 주교좌 범어대성당

 

오늘은 우리나라가 36년간의 일제 압박에서 해방된 광복절이며, 성모님께서 지상생활을 마친 다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로 천국으로 들어 올림을 받으셨다는 성모승천대축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나라로서나 한국교회로서나 참으로 기쁜 날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미사 중에 70여명의 형제자매들이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날 것입니다. 이분들이 지난 생활을 회개하고 오늘 세례를 받음으로써 온전히 깨끗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심탁 클레멘스 신부님이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그 대교구로 선교하기 위해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미사 끝에 신부님의 파견식이 간단하게 거행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모승천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된 것은 없지만, 성모승천 교의는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믿을 만한 전승과, 구세사에 있어서 성모님의 역할, 성모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성모님의 위치 등으로 받아들여진 신학적인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59항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으며 지상 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으로 부르심을 받으시어 주님으로부터 천지의 모후로 추대 받으셨다. 이로써 마리아는 다스리는 자들의 주님이시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을 더욱 완전히 닮게 되셨다.”
성모승천은 우리들에게 큰 희망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은 인간이신 성모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우리도 장차 성모님처럼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서 받게 될 구원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표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의 현실은 이 기쁜 축일에도 불구하고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세계 곳곳에서 테러와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금  세계는 전쟁 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느 때보다도 남북 간에 심각하고도 첨예한 대립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일명 사드. THAAD) 때문에 온통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하느님의 창조물인 인류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이야기하시는데 인간은 그 반대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와 폭력과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달 말에 폴란드에서 개최하는 세계청년대회에 참석하셨던 교황님께서 하루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하셨는데 2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어제가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의 순교 기념일이었습니다만, 교황님께서 콜베신부님이 돌아가셨던 그 감방에서 한참동안을 침묵으로 기도하시기도 하였습니다. 하여튼 교황님은 아우슈비츠를 방문하시면서 2시간 동안 입 한 마디 띄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것은 소리 없는 웅변이었습니다. 인류의 야만성에 대한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회와 통회였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그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크라쿠프 대교구 주교관으로 돌아오신 후 광장에 모여 있는 순례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얼마나 많은 고통과 잔혹함이 존재합니까! 어떻게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아우슈비츠의 잔혹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오늘도.”

 

일본 나가사키에 가면 우라카미라는 지역에 단 두 평짜리 집이 하나 있습니다. 일본 천황도 그 집을 다녀갔고 헬렌 켈러 여사도 다녀갔었으며 주일본 교황대사도 다녀갔었습니다. 그분들은 그 집을 보러 간 것이 아니라 그 집에 사는 나가이 다카시라는 사람을 뵈러 갔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순례객과 관광객들이 그 집을 보러 옵니다. 그 집은 여기당(如己堂)이라는 집인데, 일제 시대 때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교수였던 나가이 타카시 박사가 1951년 5월 1일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집입니다. 
그 집이 유명하게 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가이 박사가 그 집에서 엄마 없는 두 아이와 함께 살면서 세상에 던졌던 강력한 메시지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화의 메시지였습니다. 
1945년 8월 9일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로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그 당시 대학 연구실에 있었던 나가이 박사는 자신도 부상을 입었지만 수많은 사상자와 부상자들을 돌보다가 뒤늦게야 자기 집으로 가게 됩니다. 집은 이미 잿더미가 되었고 부엌에 들어가 보니 아내는 새카맣게 타버리고 뼈만 남아있었습니다. 박사는 아내의 뼈들을 양동이에 주워 담고 불에 타버려 쇠줄만 남은 아내의 묵주를 들고서 마을 뒷산에 올라가 땅에 묻고 내려옵니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나가이 박사는 우라카미가 평화를 위한 번제의 제물이 된 의미를 되새겼던 것입니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신자 8천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신자 12000여 명 중에 8000여 명을 한꺼번에 잃은 우라까미 본당의 합동위령제에서 타카시 박사는 살아남은 신자 대표로 조사(弔詞)를 했습니다. 
“우라카미의 가톨릭 신자 8천 명의 영혼이 한순간에 주님 부르심으로 승천한 것은 세계 대전쟁이라는 인류 죄악에 대한 속죄로서, 희생의 제단에 바쳐져 불태워져야 할 죄 없는 양으로 뽑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혜의 열매를 훔쳐먹은 아담의 죄와 아우를 죽인 카인의 피를 이어받은 인류가 같은 하느님의 자식이면서 우상을 믿고, 사랑의 율법을 어기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죽이던 이런 대죄악을 종결짓고 평화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오직 참회할 뿐 아니라 적당한 희생을 바쳐서 하느님께 용서를 빌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가 없던 일본에 4백 년 박해 동안 순교로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신앙을 끝내 지켜왔고, 전쟁 중에도 평화를 위한 기도를 조석으로 끊임없이 바쳐온 우리 우라카미 성당이야말로 하느님의 제단에 바쳐져야 할 유일한 양이 아니겠습니까?”(이문희 대주교의 ‘사랑으로 부르는 평화의 노래’ 37-38쪽) 
나가이 타카시 박사는 자신도 원자병에 걸려 사방 여섯 자의 여기당(如己堂)에 누워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참회와 평화를 비는 메시지를 띄움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습니다. 
어제 오후에 ‘앞산밑북카페’에서 ‘나가이 타카시의 생애’라는 책의 출판기념회가 있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카타오카 야키치라는 사람인데 1908년생으로 나가이 타카시 박사와 동년배이며 우라카미성당에서 빈첸시오회 활동을 같이 하였던 분입니다. 그 분의 두 따님 수녀님이 이문희 바오로 대주교님의 초청으로 출판기념회에 오셨다가 오늘 이 미사에 참석하셨습니다. 한 분 수녀님은 나가사키의 순심대학의 이사장이시고, 또 한 분 수녀님은 그 대학의 학장님이십니다.
1951년 5월 14일에 나가이 타카시 박사의 장례식이 나가사키 시민장으로 치러졌는데 2만 여명의 시민들이 참석하여 애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던 일본이었는데 지금은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해 헌법을 바꾸고 재무장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나가이 타카시 박사는 온 몸을 다해 평화를 외치고 ‘여기애인(如己愛人)’을 실천하였습니다. ‘여기애인’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라’(마태 22,39)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 달 31일 세계청년대회 폐막미사에서 젊은이들에게 세상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줄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그 새로운 삶의 방식은 다름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시어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루가 1, 48-55 참조).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모후여, 우리나라와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