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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된 서약은 실천을 통하여 (예수성심시녀회 종신서약미사 강론)
   2018/12/11  10:3

종신서약미사

 

2018. 12. 08. 예수성심시녀회

 

먼저 오늘 종신서원 하시는 수녀님들, 축하드립니다. 주님의 크신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1831년 조선교회를 북경교구에서 독립시켜서 ‘조선교구’로 설정해주신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께서 1841년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성 요셉’과 함께 조선교회의 수호자로 선정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 주보 축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예수성심시녀회’ 설립일이기도 합니다. 수도회 설립일을 맞이한 예수성심시녀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축하를 드리며 주님 은총 속에 더욱 큰 성장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는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던 전승입니다. 그리고 근세에 와서 성모님께서 직접 발현하시어 이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858년 프랑스의 산골 마을인 루르드에서 당시 14세의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나타나신 일입니다. 올해는 루르드의 성모님 발현 160년이 되는 해이고 우리 교구 ‘성모당 봉헌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1911년 대구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부임하신 안세화 드망즈 주교님께서는 우리 교구를 ‘루르드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께 봉헌하시고 성모님께서 우리 교구를 지켜주시기를 청하시면서 세 가지를 도와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세 가지는 주교관 건립과 신학교 설립, 그리고 주교좌계산성당의 증축입니다. 그 세 가지가 이루어지면 교구청의 제일 아름다운 자리에 루르드의 성모동굴과 꼭 닮은 성모당을 지어 봉헌하겠다고 서원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세 가지가 다 이루어져 성모당을 지어 봉헌한 지가 올해로 100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10월 13일에 성모당에서 100주년 감사미사를 봉헌하였던 것입니다. 
1858년에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베르나데트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주신 메시지 중에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다.’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는 이미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께서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습니다. 예전에는 ‘무염시태’라고 했습니다. 죄에 물들지 않고 수태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분이시기에 원죄와는 무관하게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원죄는 오늘 제1독서에 나오듯이 아담과 하와가 단순히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거역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성령을 거역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거역하면 죄와 죽음과 멸망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죄지은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숨어있던 아담이 나오더니 핑계를 댑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가 그 선악과를 따서 주기에 먹었을 뿐’이라고 하면서 하와에게 탓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와는 ‘뱀이 저를 꾀어서 따 먹었다’고 하면서 뱀에게 탓을 돌립니다. 
이것이 원죄의 결과입니다. 어느 누구도 ‘내 탓’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네 탓’이라고만 합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은 미움과 분쟁과 싸움이 끝나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 한 마디가 이 세상에 구원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말씀 한 마디가 이 세상에 구세주를 낳게 하였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이 세상에 죄와 죽음이 왔지만, 또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이 세상에 용서와 구원이 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 종신서원 하시는 수녀님들은 이제 종신토록 순명과 정결과 청빈이라는 복음삼덕으로 살겠다고 서약하실 것입니다. 하와가 아니라 마리아로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로나 문서로 하는 서약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우리 주 하느님께서 우리 수녀님들에게 큰 은총 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그저께와 어제 범어대성당의 드망즈홀에서 ‘빛으로 나아가다.’라는 연극이 네 차례에 걸쳐서 올려 졌습니다. 그 연극은 ‘동서의 피안’, ‘내심낙원’ 등의 책을 번역했던 김익진 프란치스코 선생님의 일생에 관한 연극입니다. 저도 그저께 오후에 가서 봤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김익진 선생님은 1906년 전라도 목포에서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에 유학 갔다가 어느 서점가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사서 읽고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후 그는 조선에 돌아와 세례를 받았고 해방 후 자신이 상속받은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자투리땅까지 광주교구에 주고는 1949년도에 대구로 이사 오셨습니다. 
대구에 와서는 성의여자중고등학교와 근화여자중고등학교의 교감직을 맡는 등 교육사업과 번역 일에 매진하시다가 1970년1월 6일에 만 64세의 일기로 대구 대명동 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왜 이분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무엇보다 실천한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감명을 받았으면 감명 받은 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때 감동받고 눈물 흘리고는 끝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으면 부르심을 받은 대로 살아야 하는데, 우리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였으면 봉헌한 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지난 3월 19일 ‘성 요셉 대축일’에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교황 권고’를 발표하셨습니다. 그것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교황님께서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러저러한 평범한 존재로 안주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1항) “저의 소박한 바람은 많은 위험과 도전과 기회를 안고 있는 우리 시대에 맞갖게 실천적 방식으로 성덕의 소명이 다시 한 번 울려 퍼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뽑으시어 ‘사랑으로’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기’(에페 1,4) 때문입니다.”(2항)
그러면서 교황님께서는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제3장에서 마태오복음 제5장에 나오는 여덟 가지의 ‘참된 행복’에 대하여 설명하시면서 각 행복선언마다 새롭게 성덕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이 곧 성덕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응대하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곧 성덕입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고 행동하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
“사랑을 더럽히는 온갖 것들에서 마음을 지키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
“우리 주변에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을 안겨줄지라도 날마다 복음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

 

‘참된 행복’을 사는 것이 곧 ‘성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참된 행복’은 시대의 흐름에 거슬러 나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참된 행복’을 포함한 산상수훈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애송되는 구절이지만 실천적인 면에서는 소외를 당해왔던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에 늘 읽게 되는 복음 또한 이 ‘참된 행복’입니다. 성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실천적인 면에서 외면당했던 그 참된 행복을 시대를 거슬러 실천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제서품식이나 종신서원식에서 우리는 ‘성인호칭기도’를 바칩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성인들로 하여금 지금 서품을 받거나 종신서약하는 이 사람들을 지켜주시고 이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주실 것을 청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로 하여금 성인들을 뒤따를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종신서약 하시는 수녀님들이 모든 성인들을 뒤따르고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처럼 겸손한 예수성심의 시녀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