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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슬픔에 공감하고 아픔을 함께합니다 (세월호 참사 5주기 추모미사 강론)
   2019/04/17  13:48

세월호 참사 5주기 추모미사

 

2019. 04. 16 (성주간 화요일) 성모당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오늘로서 꼭 5년이 되었습니다만, 아직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답답해짐을 느낍니다. 21세기 최첨단을 달리는 오늘날 이 시대에 어떻게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기도 싫은 그 엄청난 일이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우리는 모두 믿을 수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것입니다. 
  
‘세월호’는 경기도 안산의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5명을 포함하여 476명의 승객을 태우고 2014년 4월 15일 저녁 9시에 인천을 출발하여 제주도로 향하던 중 4월 16일 아침에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해경이 출동하고 헬기가 뜨고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고, 배가 침몰한 후에는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미수습자 5명을 포함하여 304명의 사망자를 낳게 되었습니다. 사망자 대다수가 단원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입니다. 
4년 전 세월호 1주기 미사 때 어떤 분이 ‘금요일엔 돌아오렴’이라는 책을 주셨습니다. 세월호 유가족 13분의 육성기록이었습니다. 학생들은 3박4일의 제주도 수학여행을 마치고 금요일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250명의 학생들은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생일’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는 세월호 참사로 인해 ‘수호’라는 아들을 잃어버린 한 어머니를 중심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슬픔을 그리고 있습니다. 졸지에 자식을 잃게 된 가족들의 아픔이 얼마나 크고 이겨내기 힘든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이라는 책에는 단원고 2학년 4반 김건우 학생의 어머니 노선자 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분은 죽은 아들이 그리울 때마다 자신의 카카오스토리에 글을 올렸습니다. 그 중에 자기 하소연 같기도 하고 일기 같기도 한 글 한 편이 책에 실려 있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울어야겠어. 엄마 마음이 답답해. 미워. 사람들이 미워. 우리 아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한숨을 쉬어보고. 나 잘하고 있는 거야 달래도 보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우리 아들 모습에 애써 울지 않으려고 밀어내고 있는 나를 알아채는 순간 왈칵 쏟아지는 눈물이 있다. 뚝뚝 말없이 떨어지는 내 눈물소리가 들린다. 아들~잘 있니? 엄마는 네가 보는 대로야. 울다 웃다 똥꼬에 털날 판이야. 엄마도 참 웃기다 싶어. 웃다가 울다가 먹다가... 너도 지금 큭큭대고 있지? 엄마도 엄마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계속 반복하니 정상인가 하고 지내. 제발 우리 아들 몰라보게 미치지는 말아야지 하고 산다. 엄마 꽉 붙잡아줘~ 언제 어디서든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우리 건우 내 아들 1초도 망설임 없이 알아볼 수 있게. 알았지? 사랑한다. 온 마음 다해 사랑해.”
 
공감이 가는지요? 공감은 함께 같이 느낀다는 것인데 기쁨을 함께 나누기는 쉽지만 슬픔이나 아픔을 함께 나누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함께 마음을 나누고자 해도 아픔을 직접 당한 사람과 똑 같아지기는 어렵습니다. 
한 4 년 전에 진도 팽목항에 가서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천주교 경당에서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를 드렸고, 미사 후에는 실종자 가족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의 말씀과 함께 기도를 해주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나는 그것으로 어느 정도 할 일을 했다고 스스로 자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유가족들의 슬픔은 끝이 없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생일’이라는 영화에서 수호 어머니는 죽은 아들의 생일행사를 어떤 단체가 해주려고 해도 하지 않겠다고 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아들의 생일행사를 하게 되고 생전에 아들을 알고 지냈던 친구들과 이웃사람들을 초대하여 수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를 통하여 부모는 물론이요 함께 참석한 이들이 내적인 상처의 치유와 화해를 경험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남을 위한 배려와 이해와 용서와 사랑이 참으로 요청되는 사회입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 너무나 많은 갈등과 혐오, 갑질과 비난과 폭력이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된 데에는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어떤 책임의식과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성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요한 13,21-33.36-38)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 마지막 만찬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어떤 제자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25)하고 묻습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6,22)하고 묻습니다. 우리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말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자리에서 더 큰 소리를 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37)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8)
예수님께서 예언한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밤새 심문을 받은 동안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실 베드로와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이기심이나 나약함으로 주님을 번번이 배반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때 주님의 계명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제대로 지킵니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말없이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알고 이제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더욱 열심히 살기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묻습니다. 
‘쿼바디스’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의 Henryk Sienkiewcz(1846-1916)의 소설 ‘Quo Vadis, Domine?’를 영화한 것입니다. 소설의 내용은 로마제국의 네로 황제 시대 때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니까 신자들이 베드로 사도를 살리기 위해 로마 밖으로 피신시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로마를 빠져 나가고 있는데 저 멀리 어떤 사람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가까이서 보니까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이미 삼십 여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깜짝 놀란 베드로가 “Quo Vadis, Domine?”(주님,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길, “네가 버리고 온 신자들을 위해 로마로 가는 길이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길로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들어가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였던 것입니다. 
고난 받는 사람들, 슬픔에 잠긴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자연재해보다는 인재로 인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대구의 대표적인 것이 2.18 대구지하철 화재사건이나 상인동 가스 폭발사고 등일 것입니다. 그런 인재사고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세월호 참사 5주기를 맞이하여 무고하게 희생된 수많은 영혼들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생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우리들은 이 세상을 좀 더 따뜻하고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이며 열심히 살 것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한국의 순교성인들과 복자들이여,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