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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서 있는 교회 (기해박해 순교 180주년 기념미사 강론)
   2019/05/30  13:54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 및 기해박해 순교 180주년 기념미사

 

2019. 05. 29 관덕정순교기념관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14년 8월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셔서 8월 16일에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식 미사를 주례하시고 조선시대의 순교자 124분을 복자로 선포하셨습니다. 벌써 5년이 되었네요.
124위 복자의 주요인물로는 먼저 1791년 제사문제가 발단이 된 신해박해로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있습니다. 윤지충은 다산 정약용과는 고종사촌이고 권상연과는 이종사촌입니다. 
당시 전라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소리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정조실록 권33)
성직자 영입운동을 하여 최초로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을 입국시켜서 도와주고 숨겨주다가 발각되어 1795년 6월 28일 같은 날 순교한 윤유일 바오로와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가 있습니다. 이들은 혹독한 고문에도 주문모 신부님의 행적을 발설하지 않았으며 굳게 신앙을 지켰던 것입니다. 
이분들의 목숨 건 도움으로 주문모 신부님께서 1794년에 조선에 입국하여 1801년 신유박해 때까지 선교를 하여 세례받은 신자가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님은 조선의 밀사로부터 위 세 사람의 순교 사실을 전해 듣고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구베아 주교가 디디에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은 124위 복자 중에서 유일한 성직자입니다. 103위 성인 중에는 성직자가 11분 계십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1801년 신유대박해가 일어나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순교하는 것을 알고 ‘나의 양 떼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겠고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수를 결심하고 자수를 하여 결국 1801년 5월 31일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던 것입니다.  
124위 복자는 신유박해 순교자가 거의 반을 차지합니다.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분들 중에 그 대표적인 분이 방금 말씀드린 주문모 신부님이시고, 그리고 성 정하상 바오로와 성 정정혜 엘리사벳의 부친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이며, 여성회장 강완숙 골롬바, 전라도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동정부부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등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구에서 올린 20분이 복자가 되셨습니다. 1815년 을해박해 순교자들인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김시우 알렉시오, 최봉한 프란치스코, 서석봉 안드레아, 김희성 프란치스코, 구성열 바르바라, 이시임 안나, 고성대 베드로, 고성운 요셉, 김종한 안드레아, 김화춘 야고보, 이상 11분과, 1827년 정해박해 순교자이신 박경화 바오로, 김세박 암브로시오, 안군심 리카르도, 이재행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 이상 6분과,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인 이양등 베드로, 김종륜 루가, 허인백 야고보, 이상 3분, 총 20분의 복자이십니다.

그런데 이 중에 이재행, 박사의, 김사건, 이렇게 안드레아 세례명을 가진 이 세 분의 복자는 1827년 정해박해 때 체포되었지만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셨습니다. 

올해가 기해년이지요. 기해박해가 일어난 지 180년이 되는 해입니다. 103위 성인 중에 기해박해 순교자가 70분이 계십니다. 거의 2/3를 차지하지요.
기해박해는 그 당시 조선 조정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는 아주 무례하기 그지없는 사학집단으로 몰아 박해를 하였지만 속내는 정치적인 박해였던 것입니다. 당시 천주교에 호의적이었던 시파인 안동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파인 풍양조씨 가문이 일으킨 박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요 순교자를 보면, 최양업 신부님의 아버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김대건 신부님의 아버지 성 김제준 이냐시오가 있습니다. 아들을 멀리 마카오에 유학 보내놓고 체포되어 순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인 성 정하상 바오로와 딸인 성 정정혜 엘리사벳, 그리고 부인 유소사 체칠리아가 기해박해 순교자입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께서는 성직자 영입을 위해서, 그리고 조선교회의 사정을 보편교회에 알리기 위해서 북경을 아홉 차례나 왕래했습니다. 그 결과로 1831년 9월 9일에 조선교구가 설정되었으며 브르기엘 주교님이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입국 도중에 중국에서 병사를 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2대 교구장 앵베르 범 주교님과, 모방 신부님, 사스탕 신부님이 입국하게 되는 데 이분들도 기해박해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고 순교를 하게 되니까 더 이상 신자들을 잃지 않기 위하여 자수를 하십니다. 결국 이 세 분의 선교사들은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형을 받고 순교하셨습니다. 당시 교황청에 올린 보고서에 의하면, 신자수가 1만 명에 달하였고, 그 해 영세자가 1200명, 견진자가 25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기해박해 때 이곳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하신 분이 세 분 계십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이재행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가 그분들입니다. 이분들은 1827년 정해박해 때 체포되었지만 사형집행이 늦어지면서 12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하시다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 해  5월 26일 이곳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분들이 형장으로 나아갈 때 그동안 오래 옥에서 같이 지냈던 죄수들과 간수들이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순교자 분들이 옥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죄수들과 간수들 중에는 이분들의 모범으로 인하여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하느님을 믿게 된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1839년 4월 12일자 승정원일기를 보면 당시 경상감사가 임금님께 상소한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김사건은 천주를 공경하여 받들었고 ‘그 묘미를 깊이 깨달아 비록 죽을지라도 여한이 없다’고 하였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순교자의 피가 이 땅에 떨어져 오늘의 우리들이 있는 것이며 우리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다시 말해서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면서까지 하느님을 증언하였던 그 증언 위에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날 믿음 없는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자신 있고 분명하게 증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순교 성인 복자들이여, 저희와 저희 교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