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따스한 빛처럼 오시는 예수님 (주님 성탄 대축일 밤미사 강론) |
2019/12/26 16:28 |
주님 성탄 대축일 밤미사
2019. 12. 24. 21:00 계산주교좌대성당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이 겨울 밤,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 아기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일 년 가운데 밤이 가장 긴 날이 동지(冬至)입니다. 성탄절이 동지를 지나고 바로 2-3일 후에 있다는 사실은 어둠을 뚫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더 잘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성탄의 기쁨은 2천 년 동안 교회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우리 신앙의 보화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구원 신비의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2, 1-14)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태어나셨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의 명에 의해 호적등록을 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에 갔다가 거기서 마리아가 해산을 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을 어디에 뉘였다고 합니까? 구유입니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7) 구유가 무엇입니까? 여물통, 쉽게 말해 소죽통입니다.
루카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무엇을 전해주고 있습니까? 구세주께서 위대한 왕이나 권력자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가난한 가정에서 연약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요한 복음사가의 말대로 하느님께서 당신 나라에 오셨지만 몸을 뉘일 자리도 제대로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던 것입니다. 성탄절에 이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촌에는 춥고 어두운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전쟁과 테러와 범죄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죽음의 위험에 내몰리고 있고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 가는 어린 아이들도 많습니다. 이런 위험을 피해 더 나은 세계로 찾아가는 난민들의 어려움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갈등과 분열이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서로 간의 혐오와 증오의 골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정치 상황은 불안하고, 경제 현실은 어렵습니다. 청년들은 취업난에 허덕이며,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많은 노인들이 가난과 외로움에 처해 있습니다. 서민들의 겨울나기는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정치적 혼란과 경기 침체는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를 무겁게 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합니다. 이러한 시기에 맞는 성탄절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하여 고민하게 됩니다.
얼마 전 교수신문이 정한 올해의 사자성어가 ‘공명지조(共命之鳥)’였습니다. 작년의 사자성어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이었습니다. ‘공명지조’는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상상의 새로서 ‘한 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새’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두 개이니까 얼마나 서로가 서로를 질투하고 분열되고 갈라지겠습니까! 오늘의 세계와 우리의 현실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공명지조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목숨을 함께 하는 새’, ‘운명을 같이 하는 새’ 입니다. 이 말은 ‘서로 싸우면 같이 망하고, 서로 협력하면 같이 사는 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지난달에 두 편의 영화를 봤습니다. 하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다큐 영화이고, 또 하나는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영화입니다.
영화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과 노동과 전쟁과 난민과 생태환경 등 이 세상의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교황님의 생각들과 고뇌들을 잘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미소와 유머와 유연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며 희망을 말씀하시는 교황님의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고 ‘82년생 김지영’은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서 김지영이라는 여성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고 그리고 결혼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아이를 갖게 되는 아주 평범한 한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지극히 평상적인 삶이지만 그 여성이 겪게 되는 어려움들이 피부로 와 닿게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혹자는 그 영화와 소설이 페미니즘(feminism)을 주장하고 젠더(gender)갈등을 조장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오히려 오늘날 이 각박한 세상에서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이해와 배려를 강조하는 작품으로 보였습니다.
빛이 어두운 세상을 밝고 따스하게 해 주는 것처럼, 예수님의 성탄이 오늘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김지영의 마음을,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을 더욱 밝고 따스하게 해 주기를 빕니다.
우리 교구는 2020년 새해를 ‘치유의 해’로 살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 교구민들이 대내외적으로 입은 상처에 대해 예수님께서 치유의 은혜를 내려주시고 성모님께서 우리를 잘 이끌어 주시기를 빕니다. 그 치유를 위해 아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가톨릭 신자로서의 자긍심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치유가 되고 선물이 되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2020년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인 6.25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매일 저녁 9시에 한반도의 평화를 위하여 주모경을 바치고 계시지요?
이번 대구주보 성탄특집호에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란 글이 실려 있습니다. 4년 전에도 이야기를 했던 것인데, 몇 년 전 있었던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그 장면이 나왔습니다만, 1950년 12월 크리스마스 즈음해서 있었던 흥남철수작전 중의 한 이야기입니다.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라는 화물선이 군수물자를 다 버리고 대신 14000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2박 3일 의 항해 끝에 12월 25일 거제도에 도착하였는데 내릴 때는 탑승객이 14000명이 아니라 14005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다섯 명의 아기가 배위에서 태어났던 것입니다.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는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기적의 배로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습니다. 그 배의 선장이 ‘레너드 라루’ 라는 사람입니다. 그 분은 그 후 4년 뒤인 1954년에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마리너스 수사라는 이름으로 수도생활에 전념하시다가 2001년 10월 14일 87세의 일기로 선종하셨습니다.
4년 전 미국 필리델피아에서 있었던 세계가정대회에 참석하고 뉴욕으로 가는 길에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뉴톤 수도원을 방문하였는데 놀랍게도 그 마리너스 수사님이 그 수도원에서 지내시다가 돌아가시고 묻혀 계시는 것을 알게 되어 그 분의 무덤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마리너스 수사님을 시복청원하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엄청난 일을 한 레너드 라루 선장이 전쟁이 끝난 후 왜 갑자기 수도원에 입회하여 한 평생을 이름 없이 그렇게 평범하게 살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분은 14000명의 피난민을 자신의 배에 싣고 검은 동해바다를 운행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지난해에 남북정상회담이 세 차례(2018년 4월 27일, 5월 26일, 9월 18-20일)나 있었고 북미정상회담도 작년부터 올해까지 세 차례(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2019년 2월 27-28일 하노이, 2019년 6월 판문점) 있었습니다만, 별 성과도 없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하여튼 내년에는 남북이 통일이 되지는 않더라도 평화가 안착되어 서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무슨 기적이라도 일어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간절히 가져봅니다. 남북한이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같은 민족으로서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롭게 살 새로운 방도가 찾아지기를 바라며 열심히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