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그룹웨어
Home > 교구장/보좌주교 > 교구장 말씀
제목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른 사람 (하준하 이냐시오 사망미사 강론)
   2020/09/21  11:45

하준하 이냐시오 사망미사

 

2020. 09. 16(수) 대가대병원 장례식장 경당

 

하준하 이냐시오 형제가 어제 하느님 나라로 떠났습니다. 지난 주말에 제가 베들레헴 공동체에 갔다가 주일미사를 드리고 이냐시오 형제에게 영성체를 해주었는데 그것이 마지막 영성체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날 점심식사 후 공동체를 떠나기 전에 아가다 자매가 이냐시오 형제를 위해 특별히 기도를 해주면 좋겠다고 하여 이냐시오 형제 방에 들어가 누워있는 그를 위해 기도를 바치고 나왔는데 그 기도가 지상에 있으면서 그를 위해 바친 나의 마지막 기도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냐시오 형제의 떠남으로 베들레헴 공동체 가족들과 유족들과 형제를 알고 있는 많은 분들의 슬픔이 클 것입니다. 특히 지난 15년 동안 그를 가까이에서 정성으로 돌봐왔던 아가다 자매와 룸메이트였던 김성태 안드레아 형제의 슬픔과 아픔은 더 클 것이라 생각됩니다. 자비의 하느님께서 이들의 슬픔을 위로해 주시길 청합니다.

 

이냐시오 형제는 베들레헴 공동체가 출범한 해인 2005년 7월에 공동체에 입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성탄절에 ‘이냐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베들레헴 공동체는 중증장애인 형제들의 생활공동체로 시작하면서 처음 몇 년간은 다섯 형제가 살았습니다. 저는 이 형제들을 ‘독수리 5형제’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깨어지고 찢어진 세상 사람들의 ‘독’을 고쳐주고 수리해주는 ‘독수리 5형제’말입니다.

독수리 5형제들은 아가다 자매의 주도로 매일 오전에는 함께 모여 복음나누기를 하고, 저녁에는 저녁기도와 묵주기도를 같이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글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매월 글 한 편을 쓰고 그것을 월례미사 영성체 후에 묵상글로 발표하였던 것입니다.

그 글들을 모아 2010년에 <베들레헴의 노래>라는 책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5년 후인 2015년에는 <베들레헴의 기도>라는 책을 내었습니다.

그 글 중에서 하준하 이냐시오 형제의 시는 간단하면서도 많은 여운을 남기는 글이었습니다.

 

“이제는 좀

그만 살라하소.

 

지금껏

12년을 기어 다니고

12년을 남의 손에 끌려 다니고

10년은 누워 살았고

2년째 바퀴로 굴러다니며

36년을 살았소.

 

...살아야 한데이.

그래도 살아야 한데이.”

 

<베들레헴의 노래>라는 책에 실린 ‘영양제’라는 시입니다. 본문 어디에도 ‘영양제’라는 말이 들어있지 않은데 왜 ‘영양제’라고 제목을 달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를 썼던 때는 아마도 베들레헴 공동체에 들어온 지 한 2년이 되었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냐시오 형제는 선천성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이었기에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지만 공동체에 들어와서는 오전에는 휠체어를 타고 거실에 와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복음묵상과 나누기를 하였으며 오후에는 휠체어를 타고 산책을 나서곤 하였던 것입니다.

이냐시오 형제는 이 시를 쓴 후 12년을 더 살다가 어제 하느님께 갔습니다.

역시 <베들레헴의 노래>라는 책에 ‘하루’라는, 이냐시오 형제의 시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하루였습니다.

당신이 제 옆에 계신 이유겠지요.

 

해가 뜨고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소리, 모습들,

바람의 손길, 새들의 노래, 춤추는 나무들.

저는 어느덧 밤으로 와 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를 살았습니다.

이 하루가 당신에게 가는

한 걸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이냐시오 형제는 ‘아름다운 하루’의 삶을 살다가 하느님께 갔습니다. 그의 삶이 인간적으로 참 힘들었을 것이라 여겨지기도 하지만 한 번도 그가 힘들어 하는 내색을 드러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내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몸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혼자 힘으로 돌아누울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었습니다. 스스로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양치질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대소변도 남이 도와주어야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손가락에는 컴퓨터 마우스를 겨우 누를 수 있는 힘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베들레헴 공동체를 방문하는 날 그의 방에 들어가 말을 걸면 그는 싱긋이 웃어줄 뿐이었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할 때는 소리가 너무 작고 불분명하여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가다 자매는 그의 말을 다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것은 진정 사랑하면 상대방의 아무리 작은 소리도, 아무리 불분명한 소리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 공동체에서 가장 힘없는 준하 이냐시오 형제가 공동체에서 가장 큰 힘이었으며 보물이었음을 이제 더 크게 느끼게 됩니다.

그의 떠남이 우리들에게는 큰 슬픔이요 아픔이지만 하느님 품으로 고이 떠나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냐시오를 우리보다 더욱 더 사랑하시기에 하느님께서 형제를 당신 나라로 불러 가신 것입니다. 이냐시오 형제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간직하며 우리도 남은 생애를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