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4대리구 1지역 친교의 해 지역방문 미사 강론) |
2023/07/10 10:46 |
4대리구 1지역 친교의 해 지역방문 미사
2023. 07. 06.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성동성당
우리 교구는 2030년까지 10년 장기사목계획에 따라 ‘복음의 기쁨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말씀, 친교, 전례, 이웃사랑, 선교라는, 교회의 다섯 가지의 핵심 가치를 매 2년씩 중점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2년 동안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라는 슬로건으로 ‘말씀의 해’를 살았는데, 코로나19라는 펜데믹 상황이었지만 많은 신자분들이 하느님 말씀을 가까이함으로써 많은 위로와 힘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주제로서 올해부터 2년 동안은 ‘친교로 하나 되어’라는 슬로건으로 ‘친교의 해’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규정하고 ‘친교의 교회’가 되기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느님의 백성들이 친교를 잘 이루고 있는지를 성찰하고, 우리 모두가 친교를 잘 이룰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친교의 해 동안 주교가 대리구의 지역을 방문하여 신부님들과 간담회를 가지고 미사와 성시간을 함께 하기로 하였는데, 오늘 4대리구 1지역 차례로서 경주 성동성당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전례가 끝난 후에는 경주 지역 내 각 본당 총회장님들과 함께 차담회도 갖기로 하였습니다. 이런 시간과 노력들이 친교의 교회를 이루는 데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친교를 세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친교, 이웃과의 친교, 그리고 피조물과의 친교가 그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하느님과의 친교를 잘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친교의 원천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미사나 여러 가지의 기도, 그리고 오늘 함께 할 성시간 같은 전례에 함께 하는 것은 하느님과의 친교를 이루는 데 있어서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친교가 잘 되어야 다른 친교도 잘 이루어 질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창세기 22,1-19로서 그 유명한 아브라함의 제사에 대하여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길,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고 하셨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제가 왜 바칩니까? 제가 어떻게 얻은 아들인데, 저는 못 바칩니다. 죽어도 못 바칩니다. 차라리 저를 데려가십시오.’하고 하느님께 대들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며칠을 걸어 모리야 산에 다 와 갈 때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7) 그러자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애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8)
드디어 모리야 산에 도착하여 제단을 쌓고 아들 이사악을 묶어 장작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칼을 잡고 손을 뻗쳐 자기 아들을 내리치려고 하는 그 순간까지 아들을 죽이지 않을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로마 4,18)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아도 끝까지 주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고 하면서 마침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를 번제물로 바치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곳 이름을 ‘야훼 이레’라고 하였습니다. ‘야훼 이레’라는 말은 ‘주님께서 살펴보신다.’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신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좋은 말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이렇게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살펴보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느님과의 친교를 이룬 좋은 표본이며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마태 9,1-8)은 예수님께서 어떤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리고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만이 아니라 그 병자를 데리고 왔던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는 그 사랑과 믿음이 소중한 것이고 예수님의 치유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라.”고 말씀하셨는데 거기에 있던 율법학자들이 속으로 ‘이 사람이 하느님을 모독하는군.’하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구약에서 죄의 용서는 하느님의 고유 권한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그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고해성사를 통해서 사제의 입으로 죄의 용서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리아 고레티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제가 중학생 땐가, 고등학생 땐가 마리아 고레티 성인전을 읽은 적이 있는데, 무척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10여 년 전 로마에서 재유럽 교구 사제모임을 할 때 성녀 모니카가 아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품에서 마지막 눈을 감았던 ‘오스티아 안티카’라는 도시로 가는 길에 어느 시골에 있는 성녀 마리아 고레티의 생가를 들렸던 기억이 납니다.
열두 살 소녀 마리아 고레티는 칼에 찔려 많은 피를 흘리고 병원에 실려 가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그렇게 만든 청년 알레산도로를 용서합니다. 27년의 형기를 마친 알레산드로는 출소하자마자 고레티의 어머니를 찾아가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고레티의 어머니는 ‘이미 고레티는 너를 용서했단다.’하고 말했고, 둘은 함께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 후 알레산드로는 재속 수도회를 찾아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죄를 보속하며 수도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성인 성녀들의 생애를 볼 때, 우리는 그분들보다 몇 배나 더 많이 누리고 편안하게 살면서도 별일 아닌 일에도 분노하고 작은 용서와 배려에도 서툴고 인색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가 친교로 하나 되고, 우리 교회가 친교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친교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향해,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해’ 살 때 우리 공동체는 친교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노력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 성녀들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