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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화 (세나뚜스 성모의 밤 미사 강론)
   2015/05/07  11:43

세나뚜스 성모의 밤


2015. 05. 05.(화) 성모당

 

 오늘 우리는 이 아름다운 5월 성모성월에 교구 ‘레지오 마리애’ 주최로 ‘성모의 밤’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5월 5일 ‘어린이날’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오늘 미사 끝에 ‘3대 레지오 가족 교구장 강복장’을 준다고 해서 그런지 어린이들이 좀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한 가족 안에 3대가 같이 레지오 단원으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정 성화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분들에게 미리 축하를 드리며 하느님의 강복을 빕니다.

 그런데 교구 ‘레지오 마리애’는 재작년부터 5월 5일 ‘어린이날’에 ‘성모의 밤’ 행사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린이날’에 행사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이유가 특별히 없다면 예수님께서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하셨으니까 모두 어린이와 같이 되고자 하는 뜻에서 오늘 성모의 밤 행사를 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영국의 계관시인 워즈워드는 ‘무지개’라는 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는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어린이는 어른의 마음의 고향’이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든 어른은 어린이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릴 적의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동심의 세계를 잊지 말고 늘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동문학가인 윤석중 선생님은 ‘동심은 인간의 본심이요 양심’이라 했습니다. 워즈워드 시인의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던 말이나, 윤석중 선생님의 ‘동심’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의 뜻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여튼 오늘 성모의 밤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이 어린이와 같이 되어서 천국을 얻는 은혜를 입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지난 연말연시에 프랑스 루르드에서 저희 교구 재유럽사제모임을 가졌었습니다. 우리 교구 주보성인이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님이십니다. 1911년에 우리 교구 초대교구장이신 안세화 드망즈 주교님께서 교구를 ‘루르드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께 봉헌하면서 우리 교구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시기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루르드에서 재유럽사제모임을 마치고 저는 안주교님의 어릴 때 고향과, 계산본당의 초대 본당신부님이신 김보록 로베르 신부님의 고향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두 분의 고향을 방문하고 또 루르드에서 사제 모임을 가지면서 늘 제 머리와 제 가슴 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성모님께서 우리 교구를 지금까지 잘 돌봐주셨구나 하는 감사하는 마음과, 그리고 계속해서 저희 교구를 잘 이끌어 주시고 하느님께 잘 전구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성모의 밤 미사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도 지금 저와 같은 마음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특히 성모님을 사령관으로 모시고 있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은 더욱 열심히 기도할 뿐만 아니라 늘 성모님의 성덕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평화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절실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 평화를 비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만, 유대인들이 사람을 만나서 나누는 인사말이 “샬롬!”입니다. ‘평화를 빈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평화가 너무나 절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요즘은 보통 그냥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합니다만, 옛날에는 아는 사람을 만나면 “아침 드셨습니까?”하고 인사했습니다. 동네 어른을 만나면 “어르신, 진지 드셨습니까?”하고 인사를 했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는 무엇보다도 먹고 사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유럽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날씨를 주로 이야기합니다. “Good Morning!” “Bon Jour!” 여유가 있는 거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제 떠날 때가 다가오는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고별사를 하시면서 ‘평화를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같지 않다.’고 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은’ 그 평화는 어떤 평화일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평화일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에도, 환난 가운데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평화인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 14,19-28을 보면 바오로 사도가 사람들에게 선교를 하다가 유대인들로부터 돌 세례를 받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을 뻔하였지만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고 다른 지방으로 가서 그 일을 계속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바오로 사도께서는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선교여행을 다 마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와서는 다른 사도들과 신자들에게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는 것을 보면 바오로 사도께서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평화를 누렸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여러분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성모님도 온갖 어려움을 다 겪으셨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셨던 분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를 주님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평화도 필요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전쟁과 폭력과 테러와 살인 행위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평화가 간절히 필요합니다.

 올해 우리나라는 광복 70주년과 분단 7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1945년에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그와 함께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된 지가 70년 세월이 흘렀건만 별로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일본은 과거사를 왜곡하고 있고 아시아에서 새로운 패권을 장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핵을 개발하였고 계속하여 남한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관계들이 좋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바라는데 세상은 왜 평화를 주지 못하는 것까요? 그것은 인간의 욕심 때문이지만, 평화를 바라는 우리들의 기도가 부족한지 모르겠습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우리 성모님께 점 더 간절히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주님의 평화의 도구로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은 최초의 평화의 도구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성모님은 오로지 하느님의 뜻의 실현을 위해서, 그리고 세상의 구원과 평화를 위한 도구로 당신 자신을 다 내어놓으셨습니다. 이런 성모님처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우리 자신도 주님 평화의 도구로 써지도록 내어놓아야 하겠습니다.


 “루르드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와 저희 교구와 이 세상 평화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