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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매일 기적을 일으키는 도인(道人)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종신서원 미사 강론)
   2016/02/05  21:10

종신서원미사


2016. 02. 05.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오늘 다섯 분의 수녀님들이 종신서원을 하게 됩니다. 미리 축하를 드리며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의 종신서원은 통상 2월 10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축일’에 하는데 올해는 그날이 설 연휴이고 ‘재의 수요일’이기 때문에 오늘 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녀 아가타 동정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으며 자신이 하느님께 서원한 것을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지켰던 성녀 아가타의 전구로 오늘 종신서원 하시는 수녀님들이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딸로서, 하느님의 성실한 정배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언제부터인가 수도생활을 일명 ‘봉헌생활’이라고도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1997년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회칙 ‘봉헌생활’을 발표하셨고, 또 2월 2일 ‘주님 봉헌축일’을 ‘봉헌생활의 날’로 정하심으로 그리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재작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봉헌생활의 해’가 2014년 11월 30일에 시작하여 그저께 2월 2일에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런데 1997년에 ‘봉헌생활’이라고 번역한 회칙의 라틴어 제목이 ‘Vita consecrata’입니다. 여기서 consecrata란 말은 ‘성별(聖別)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성별하다’는 말은 ‘거룩한 일에 쓰기 위해 따로 떼어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수도생활을 ‘축성생활’이라고도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말에 의하면 수도생활이란 하느님께서 당신이 필요한 데 쓰시기 위해 따로 떼어놓은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느님께서 수녀님들에게 침을 발라놓는 것, 요즘 말로 찜해 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직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직자 수도자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일에 쓰시기 위해 따로 떼어놓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 동안 ‘봉헌생활’이라는 말이 맞느냐, ‘축성생활’이라는 말이 맞느냐 하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저는 둘 다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편에서는 ‘축성’이라는 말이 맞을 테고, 우리 편에서는 서원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니까 ‘봉헌’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지난 1년간을 ‘봉헌생활의 해’로 정하셨던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수도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령’ 반포 50주년을 맞이하여 그리 한 것이었습니다. 그 교령의 원래 제목이 ‘완전한 사랑’입니다. 수도생활이야말로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봉헌이요 완전한 사랑인 것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회칙 ‘봉헌생활’ 18항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결, 청빈, 순명으로 요약되는 예수님의 생활방식은 이 땅에서 복음을 가장 철저하게 실천하는 길로 드러난다.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받아들이신 길이므로, 이 길은 외아들로서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과 이루는 관계를 드러내는 하느님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전통은 언제나 봉헌생활의 객관적 우월성을 이야기해 왔다.”
이처럼 정결과 청빈과 순명은 예수님의 생활방식이었고 많은 성인 성녀들의 생활방식이었습니다. 그 길을 우리도 따라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으로 할 수 있는 결심이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년 동안 준비해 왔고 수년 동안 기도해 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이처럼 하느님의 완전성에 도달하는 것, 성성(聖性)에 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삶의 방식이 있고 길이 있지만 성성에 이르는 방식으로 볼 때 수도생활이 가장 확실한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도 하느님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봉헌생활이 객관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 42) 고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수녀님들도 참 좋은 몫을 택하셨습니다. 이제 그분 뜻에 맞게 사는 일만 남았습니다. 
 
정채봉 선생님의 동화 중에 이런 동화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읽은 것이라서 기억을 더듬어 보겠습니다.
어느 섬에 매일 기적을 행하는 도인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어떤 젊은이가 그 도인을 만나기 위해 부둣가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불고 파도가 세어서 배가 출항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숙에 들어갔는데 손님이 많아 어떤 노인 한 분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같이 지내는데, 그 다음 날도 파도가 세어서 배가 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청년이 하는 일은 하루 종일 방에 드러누워 있거나 가끔 부둣가에 나가 배가 언제 뜨나 하고 보고 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화초에 물을 주기도 하고 마당을 쓸기도 하는 등 무언가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청년이 물었습니다. “그것은 집주인이 할 일이 아닙니까?” 노인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내 일, 네 일이 어디 있습니까? 시간 나는 사람이 하면 되지요.” 
노인이 속옷과 양말을 빨아 빨랫줄에 걸고 있는데, 젊은이가 또 물었습니다. “햇빛도 없는데 마르겠습니까?” 그러자 노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빨래는 햇빛보다 바람에 더 잘 마릅니다.”
3일째 되는 날 노인이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왜 그 섬에 가려고 합니까?” 청년이 그제야 ‘그 섬에 매일 기적을 행하는 도인이 살고 계시다는데 그 도인을 만나보기 위해서’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섬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다 보았습니다.”

수도자(修道者)라는 말은 말 그대로 도(道)를 닦는 사람입니다. 도를 닦는다고 하니까 대단한 말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의외로 아주 일상적이고 기본적인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수도자로서 기본에 충실 하는 것, 자신이 서원한 것을 끝까지 잘 지키는 것, 그리고 매일 주어진 소임에 정성을 다 하는 것, 이것이 도(道)요 수도(修道)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수녀님들도 매일 기적을 일으키는 도인(道人)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