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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람을 잡으려면 (성서사도직 말씀잔치 파견미사 강론)
   2016/05/30  11:58

성서사도직 말씀잔치 파견미사 


2016. 05. 28. 교육원 다동 대강당

 

오늘 우리는 2016년 교구 성서사도직 상반기 말씀잔치를 마무리하면서 파견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잔치에 참석하신 모든 성서모임 가족 여러분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가면 광장을 지나 성당 입구 양 옆에 커다란 석상이 서 계십니다. 한 쪽에는 베드로 사도, 또 한 쪽에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그런데 두 분 다 양 손에 무엇을 들고 계십니다. 무엇이지요? 
베드로 사도는 성경과 열쇠를 들고 계시고, 바오로 사도는 성경과 칼을 들고 계십니다. 두 분 다 성경을 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말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에서 힘을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열쇠는 무슨 뜻인지 알지요? 그럼 바오로 사도의 칼은 무슨 뜻입니까? 에페소서 6,13-17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도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14) 
늘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올해 우리 교구의 사목지침은 ‘가정, 가장 가까운 교회’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가 가정인데, 그 가정을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의 실천으로 ‘가장 가까운 교회’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가정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있으면 가정이 곧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성화되지 않고서 이 세상이 성화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가정이 어떠한지는 여러분들이 다 아실 것입니다. 가정의 심각한 위기를 우리 모두가 느낍니다. 부부사이든, 부모와 자식 사이든, 형제 사이든 그 관계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느님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에페소서 5, 31-33에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둘이 합하여 하나가 된다고 했는데 하나가 잘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사는 부부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이가 엄마한테 물었습니다.
“엄마, 토끼를 잡으려면 어디를 잡아야 해?”
“귀를 잡으면 된단다.”
그때 고양이 한 마리가 담벼락 위에 올라서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다시 물었습니다.
“엄마, 고양이를 잡으려면 어디를 잡으면 돼?”
“얘야. 고양이는 목덜미를 잡으면 꼼짝 못한단다.”

 

그럼, 사람을 잡으려면 어디를 잡아야 합니까? 어디를 잡아야 꼼짝 못합니까? 
사람을 잡으려면 사람의 마음을 잡아야 합니다. 마음을 잡으면 그는 꼼짝없이 내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지, 서울에 가 있든지, 부산에 가 있든지 마음을 잡아놓으면 매일 전화를 하고 안부를 묻고 할 것입니다. 
그럼, 마음을 어떻게 잡을 수 있습니까? 주는 것입니다. 용서해주고, 감싸주고, 이해해주고, 들어주고, 칭찬해주고. 시간을 내 주고, 이렇게 주는 겁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모습은 용서해주기보다는 비난하고, 들어주기보다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칭찬해주기보다는 흉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관계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부부사이든, 부모와 자녀 사이든, 친구 사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인데 주는 일에는 소홀히 하면서 받으려고만 합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과 힘을 너와 나의 사랑을 키우는 데 쓰지 않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데에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와 나의 관계가 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주제 말씀이 무엇입니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루카 15,31)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한 말입니다. 
아버지는 왜 그런 말을 했습니까? 큰 아들이 자기 동생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의 반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동생을 다시 받아주는 아버지가 못마땅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큰 아들을 타이르는 것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우리는 작은 아들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큰 아들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자비의 특별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 책자의 표지를 보면 렘브란트의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 자기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작은 아들의 등을 감싸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에 나타난 아버지의 두 손을 가만히 보면 한 손은 남성의 손이고 또 한 손은 여성의 손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자식을 용서하고 감싸주는 부모의 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 손은 하느님 아버지의 손인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루카복음 15,11-32을 전체 복음의 핵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서의 다른 것은 다 없어져도 이 부분만 남아있어도 복음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 말씀을 예전에는 ‘탕자의 비유’라 불렀었는데 새 성경에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비유의 제목을 그것보다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라 해야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 비유에서 진짜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변변찮은 두 아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 더 나아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의 용서, 하느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알고 우리도 그렇게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