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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고 일하라(Confide et labora) (성모당 봉헌 100주년 기념미사 강론)
   2018/10/15  11:9

성모당 봉헌 100주년 기념미사


2018. 10. 13.(토) 11:00 성모당

 

오늘 ‘성모당 봉헌 10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세월 동안 우리 교구에 수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를 드리며, 특별히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 교구를 위해 전구해 주시고 보호해 주셨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이 기쁜 날에 강론을 시작하면서 먼저 멀리 프랑스에서 오신 두 분의 주교님과 두 분의 신부님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교구 초대 교구장이신 안세화 플로리안 드망즈 주교님의 고향 교구인 스트라스부르 대교구의 뤽 라벨 대주교님(Mgr. Luc Ravel)과 위베르 슈미트 총대리 신부님(Vicaire General Hubert Schmitt)이십니다. 그리고 대구본당의 초대주임신부인 김보록 아킬레오 로베르 신부님의 고향 교구인 벨포르 몽벨리아흐 교구의 도미닉 블랑쉐 주교님(Mgr. Dominique Blanchet)과 장 파이(Jean Faye) 주교대리 신부님이십니다. 
이 분들을 모시고 온 신부님들은 현재 이 두 교구에서 선교사목을 하고 계시는 심탁 끌레멘스 신부님, 박준용 유스티노 신부님, 송양업 토마스 신부님이십니다.
이분들은 지난 화요일에 대구에 도착하셔서 교구의 여러 곳을 둘러보셨고 어제 저녁에는 100주년 기념성당인 주교좌범어대성당에서 있었던 음악회에도 참석하셨습니다. 오늘 성모당 봉헌 100주년 본 날을 맞이하여 진심어린 환영의 인사를 드립니다.  
 
김보록 로베르 신부님은 경상도지역 담당신부로 1885년 칠곡 신나무골 교우촌에 부임하셔서 사목을 시작하셨습니다. 3년 후 상리동 새방골로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3년 후인 1891년에 드디어 대구읍내로 들어와 현 계산성당 자리에 터를 잡게 됩니다. 거기에 처음 한옥 기와집으로 성당을 지었는데 2년도 채 안 되어 원인 모를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습니다. 로베르 신부님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1902년에 불에 잘 타지 않는 벽돌조 고딕식 성당을 지었고 1919년 계산성당을 증축하여 축성할 때까지 사목하셨으니까 34년 동안 계산본당신부로 계시면서 계산본당 뿐만 아니라 우리 교구의 기초를 닦는 데 있어서 큰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안세화 드망즈 주교님은 1911년 4월 8일에 교황 비오 10세로부터 대구대목구의 첫 주교로 임명을 받고 1938년 2월 9일에 선종할 때까지 27년 동안 참으로 열과 성을 다하여 사목하심으로써 우리 교구의 기초를 닦으시고 반듯한 교구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제가 몇 마디로 로베르 신부님과 드망즈 주교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사실 로베르 신부님께서 경상도 전교담당을 맡고 대구읍내로 들어와 현 계산동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얼마나 우여곡절과 고초가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드망즈 주교님께서는 대구의 초대 주교로 부임을 하셨지만 당신이 머물 집조차 없었기 때문에 계산성당 근처의 한옥 한 채를 세내어 임시로 머물러야 했었습니다. 그래서 주교님께서는 마치 아이가 어머니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듯이 성모님께 도와주시를 청하며 의탁하셨던 것입니다. 
1911년 6월 11일에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주교서품을 받은 안세화 드망즈 주교님께서는 6월 26일에 대구에 부임하시고 처음 맞이하는 주일인 7월 2일에 루르드의 성모님을 교구 주보로 선포하시고 세 가지를 성모님께서 도와주시기를 청원드렸습니다. 교구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가지가 있어야 했습니다. 첫째는 교구청 주교관을 건축하는 것이고, 둘째는 신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주교좌성당을 증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성모님께서 도와주시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회장님이 기증한 교구청 땅의 가장 높고 아름다운 곳에 루르드의 마사비엘 동굴을 지어 봉헌하겠다고 허원하였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세 가지가 몇 년 안에 이루어지게 되어 100년 전 바로 오늘 이 성모당을 축복하고 봉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간단하게 이렇게 성모당의 유래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 성모당이 그렇게 간단하게 지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안세화 주교님께서 1918년 10월 13일에 성모당을 봉헌하시면서 ‘대구교구 7년에 대한 증거로 남기고자’ 라는 글을 남기셨습니다.
거기에 보면, 1913년에 주교관을 지었고 1914년에 신학교를 설립하였지만 셋째 청인 주교좌성당 증축은 전쟁(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모금이 잘 안 되어 늦어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16년에 소세 신부님(한국명;소세덕, 당시 40세.)이 병이 들어 위독하다는 의사의 진단을 듣고 성모님께 한 서원을 수정하게 됩니다. 성모님께서 소세신부를 낫게 해주시면 주교좌성당 증축 전에 성모당을 지어 봉헌하겠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성모님께서는 소세신부님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1917년 7월 31일에 성모당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그해 12월 30일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성모님께서 주교좌성당 증축 방법을 가르쳐주심으로써 세 가지 청을 다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그 글 중간에 주교님께서는 이렇게 쓰고 계십니다.
“천주의 성모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재정 관리인이 되어 주셨고 세계 각처에서 보내온 헌금으로 허원의 소청뿐 아니라 전쟁 때문에 한때 유지비마저 부족했던 교구의 자금을 쓰지 않고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해결할 수 있게 도와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우리 교구를 위해서 꼭 들어주시고 빌어주실 것이라는 주교님의 그 확고한 믿음을 볼 수 있고, 허원을 수정하면서까지 한 사람의 사제를 살려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 같은 사랑을 볼 수 있으며, 이런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가 된 교구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전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이셨던 고 최석우 신부님은 드망즈 주교님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믿고 일하라(Confide et labora)’는 그의 주교 표어가 말해주듯이 그는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서 초자연적인 힘을 얻어내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에서 본래 타고난 강한 의지와 조직력의 덕분으로 초대 교구장으로서의 어려운 임무를 다할 수 있었다.”(‘드망즈 주교 일기’ 해제에서)
성모당 축복식이 있기 바로 전날인 10월 12일자 일기에 주교님은 이렇게 쓰셨습니다. “모든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부들이 도착했고, 5일씩이나 걸어온 교우들을 포함해 교우들도 아주 많이 왔다.”
오늘 5일씩이나 걸어오신 분 혹시 계세요? 그 당시 충청도 이남이 다 대구교구였으니까 열심한 신자들이 먼 데서 오려면 5일이 아니라 10일도 걸렸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성모당 봉헌 날짜를 왜 10월 13일로 정했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날은 불과 한 해 전에 있었던 파티마 성모님 발현 마지막 날이기도 하였습니다만, 그것과는 상관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성모동굴은 1918년 여름에 완공을 하였는데 프랑스에 주문한 성모상이 늦게 도착하였던 것입니다. 프랑스 마르세이유항을 출발해서 일본 고베항을 거쳐 부산항으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9월 28일자 일기를 보면 ‘그렇게도 기다린 성모상 발송에 관한 소식이 고베로부터 오늘 왔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10월 1일 드디어 대구에 성모상이 도착하였는데 조금 부서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굴과 손은 다행히 부서지지 않아서 시멘트로 붙였다고 합니다. 그 성모상이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교님께서는 성모상이 도착한 그 날짜로 공문을 내어 10월 13일 주일로 축복식을 갖기로 하였다고 하면서 모든 신부님들은 참석하라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날짜를 주일로 정한 것은 많은 신자들이 이 축제에 참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100년 전 오늘 안주교님께서는 교구 내 사제단과 신학생들, 그리고 대구와 각 처의 남녀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모 동굴과 성모상을 축성하였고 주교 대례미사를 봉헌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미사 후에는 성모당 순례에 대한 사목교서를 발표하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교서에서 성모님께서 1858년 프랑스 루르드에서 15세의 소녀 벨라뎃다에게 발현하신 이야기를 하시고 대구에 루르드 성모동굴을 짓게 된 경위에 대해서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모당 순례에 대한 권고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대구 루르드 굴에 남녀 교우들이 참배하도록 권면합니다. 남방 남녀 교우들은 이 세상에서 성모님을 열심히 공경함으로서 영혼과 육신의 은혜를 많이 받으시고, 천국에 가서는 성모의 석상이 아니라 벨라뎃다와 같이 성모님을 친히 뵙고 성모님과 영원히 천국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성모당을 봉헌한 그날 주교님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소생한 팡파르의 연주와 매우 명상적이면서도 대단히 열성적인 거대한 군중과 함께 이상적인 날씨 덕분에 봉헌 동굴의 낙성식이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이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영광과 감사!”
100년 전 그 날 모습이 바로 오늘 모습과 비슷합니다. 일주일 전만 해도 태풍이 와서 온 나라가 힘들었었는데 오늘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으며 대건중학교의 관현악단의 팡파르가 힘차게 울려 퍼졌습니다. 정말 하느님과 성모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7년 전 우리 교구는 교구설정 100주년을 지냈습니다. 사실은 2008년 성모당 봉헌 90주년이 되던 해부터 우리 교구는 교구 100주년을 본격적으로 준비하였습니다. 그해는 마침 ‘루르드 성모님 발현 150주년’이 되는 특별 희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옛날 드망즈 주교님께서 신학생 때 파리외방전교회를 지원하고자 할 때 루르드로 성지순례를 가서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였던 것처럼 그 해 10월에 교구의 순례단을 이끌고 루르드로 성지순례를 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그 루르드에서 저는 그 당시 우리 교구가 계획하고 있었던 세 가지 사업, 즉 ‘제2차 교구 시노드 개최’와 ‘교구 100년사 편찬,’ 그리고 ‘100주년 기념 대성당 건립’을 도와달라고 기도드렸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저희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습니다. 
올해 다시 성모당 봉헌 100주년을 맞이하여 저는 작년 대림절을 시작하면서 우리 교구민들에게 ‘새로운 서약, 새로운 희망’이라는 사목교서를 발표하였습니다.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고 성찰하며 교구 초창기의 절박한 상황보다 더 절실한 마음으로 성령께 의탁하며 하느님의 은총과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00년 전 안세화 드망즈 주교님과 전 교우들이 루르드의 성모님을 모시고 서원을 하였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도 참으로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교회 본연의 모습을 새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요한 2,1-11)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여라.”(5) 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성모님의 뜻이며 하느님의 뜻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구 쇄신과 발전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 주시고 새롭게 살고자 노력하시는 모든 교우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의 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와 저희 교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성인 성녀와 복자들이여, 저희와 저희 교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