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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화를 위한 빛과 소금 (안중근 의사 순국 109주기 추모미사 강론)
   2019/03/25  10:46

안중근 토마스 의사 순국 109주기 추모미사


2019. 03. 23(토) 11:00 계산성당

 

안중근 토마스 의사 순국 109주기를 맞이하여 대구지방변호사회와 대구가톨릭대학교 안중근연구소 주체로 추모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1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한반도에 간절히 요청되는 것은 바로 ‘평화’입니다. 오늘 안중근 의사 순국 109주기 추모미사를 드리면서 안 의사님께서 그토록 간절히 염원했던 이 한반도의 평화와 동양평화를 위해서,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이 땅의 빛과 소금이 되어 참된 평화가 정착되도록 헌신할 것을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안중근 의사께서는 1907년 만주로 가서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벌이기 전에 당시 이곳 계산성당에 있던 ‘해성재’라는 학교에 초빙되어 강연을 하였다는 설도 있고, 또 안 의사께서 거사를 하고 난 후 여순 감옥에 갇혀계실 때 대구의 신자들이 성금을 모아 전달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지금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당시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외채를 상환하고 나라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대구의 서상돈 회장님과 김광재 선생님 등이 일으킨 국채보상운동의 관서지부장을 안 의사께서 잠시 맡아서 활동하기도 하였던 것을 볼 때, 그 당시 대구와, 그리고 대구의 천주교 신자들과 어떤 교류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안 의사께서는 1녀 2남을 두었는데 첫 따님이 현생(1902년생)이고 장남이 분도(1905년생)이며 차남이 준생(1907년생)입니다. 따님 안현생 씨는 6.25동란 때 자녀들을 데리고 대구로 피난을 와서 당시 최덕홍 주교님의 주선으로 남산동 교구청 앞집에 머물렀는데 마침 1952년 5월 15일에 남산동에서 개교한 효성여대의 불문과 교수로 4년 여 동안 봉직하였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대구가톨릭대학교에 전국 유일의 안중근연구소가 생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안중근 의사의 거사에 대한 신앙적이며 윤리적인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안중근 의사가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고, 살인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어겼지 않았나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로 인하여 안 의사께서는 천주교회 안에서 수십 년 동안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에야 교회 제도권 안에서 안중근 의사를 새롭게 보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 선종 10주기를 맞이한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1993년에 있었던 안중근 의사 추모미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의거는 일제의 무력침략 앞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행위였으므로 정당방위이며 의거로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당시 안중근 의사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읽은 참 지식인이었고 선각자였습니다. 자신이 처한 시대 안에서 나침반을 보듯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안 의사께서는 자신이 믿는 신앙과 민족의 미래에 자신의 일생을 흔들림 없이 내어놓았던 것입니다. 3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기까지 안중근 의사의 짧은 일생은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 민족, 이 나라와 동양 삼국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온 몸을 던졌던 일생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께서는 감옥에서 대우를 잘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안 의사의 일본인 변호사들은 안 의사가 ‘세계적으로 위대한 인물’인 이토 히로부미를 잘못 이해하고 저격하였기 때문에 무죄를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 의사께서는 일본 관헌들의 후대와 오해 인정에 따른 형벌 면제 제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이유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 15가지를 열거하기도 하였습니다. 안 의사께서는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이 수행한 일이 잘못된 판단에 따른 잘못된 일이었다고 인정하기를 끝까지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그의 죽음이었습니다. 
며칠 전에 안중근 관련 유투브를 찾다가 ‘마지막 간수’ 라는 제목의 방송프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여순 감옥에서 안 의사를 담당했던 간수 ‘지바’ 상병이 주인공인 프로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을 증오하고 있었는데 안중근이 아무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안중근의 정신과 인품에 감화를 받고 안 의사의 사형집행에 대하여 오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가 ‘마지막 간수’로서 안 의사에게 받은 유묵이 ‘爲國獻身軍人本分’입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유묵을 그 ‘마지막 간수’의 증손자가 1979년에 한국정부에 돌려줍니다. 9년 전에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구박물관에서 안 의사의 유품과 유묵 전시회가 있었는데 그 때 그 유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그 지바 가문에서는 지금까지 해마다 안중근 의사의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안 의사께서 여순 감옥에서 직접 쓴 ‘안응칠 역사’에는 그의 신앙과 교회에 대한 신뢰, 그리고 조국과 세계의 복음화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안 의사께서는 1910년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2월 17일 당시 고등법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사형을 3월 25일에 집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안 의사에게 마지막 고해성사를 주었던 빌렘(홍석구) 신부가 고향인 프랑스의 로렌 지방의 지인들에게 쓴 1912년 3월 19일자 편지에 의하면, 1910년 3월 25일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인 ‘성 금요일’이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안 의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성 금요일에 사형 집행이 되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고, 그 다음날인 성 토요일에 사형집행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안중근 의사의 죽음은 그 자신이 이해한 것처럼 죄 많은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안 의사께서는 3월 9일 빌렘신부와 함께 면회 온 동생 정근과 공근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고.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고.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 의사께서 예고한대로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전국 방방곳곳에서 울려 퍼졌던 것입니다. 
올해가 바로 그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정부와 민간단체에서 많은 이벤트와 행사가 있었습니다.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도 지난 3월 5일에 ‘대구 최초의 만세운동 현장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성 유스티노 캠퍼스에서 3.5 만세운동 기념 작은 음악회를 가졌고, 이어서 ‘3.1운동과 대구대교구’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안 중근 의사께서 가졌던, 조국과 인류 평화와 구원을 위한 그 숭고한 뜻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날 엄중하기 그지없는 현실 앞에 놓여있는 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하여, 더 나아가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마음으로 나아갈 것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마태 5,13-16)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들어봅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