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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은총의 70년! (근화여중 개교 70주년 기념미사 강론)
   2019/05/13  16:55

근화여중 개교 70주년 기념미사

 

2019. 05. 08.

 

먼저 오늘 근화여자중학교 개교 7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축복이 여러분들과 이 학교에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근화여자고등학교도 개교 55주년이 되었다고 하니 함께 축하드립니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한 후에 우리 교구는 학교를 많이 세웠습니다. 1946년에 김천 성의중학교와 왜관 순심중학교, 그리고 대건중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1949년에는 경주 근화여자중학교와 마산 성지여자중학교, 그리고 효성여자중학교를 세웠습니다. 
근화여중은 1949년 2월 28에 개교한 이래 많은 발전을 거듭해왔습니다. 그동안 우리 학교를 이끌어주시고 인도해주신 하느님께 먼저 감사와 영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열과 성을 다 쏟으신 선생님들, 학생들, 학부모님들, 그리고 동창회원들 무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학교 역사가 70년이나 되었기에 그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분들도 더러 계실 것이기에 이분들도 오늘 우리는 함께 기억하면서 기도드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이 어버이날이지요? 자식이 부모님에게 해야 할 도리가 무엇입니까? 효도이지요. 공자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충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주에 ‘충효동’이 있지요. 경주가 충효가 뛰어난 고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천주교에 십계명이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열 가지의 계명입니다. 
1.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2.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3.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4. 부모에게 효도하라. 등등. 1-3 계명은 하느님에 대한 계명이고 4-10 계명은 이웃에 대한 계명입니다. 사람에 대한 계명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효도인 것입니다. 
집회서3장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2-4)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로, 그가 살아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12-14)
우리는 부모님께만이 아니라 선생님께도 존경과 순명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지극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김익진 프란치스코’ 라는 분을 아십니까? 1906년에 전라도 목포에서 태어나셨고 1919년 중학교부터 일본에 유학을 갔었고 1929년에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또 중국 북경대학 언어학과에서 공부하시고 귀국하였습니다. 1949년에 김천성의여자중학교 교감을 했고 1053년부터 한 2년 간 경주 근화여자중학교에서 교감 겸 영어 선생님을 하셨던 분입니다. 
이 분의 형이 김우진이라는 사람인데 일본 유학생이고 극작가입니다. 그런데 그는 1926년 8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이면서 대중가요 ‘사의 찬미’를 불러 큰 히트를 쳤던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졌던 사람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김익진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근화여중에서 교감선생님을 하셨으니 어떤 분이신지 아시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김익진 선생님이 어떻게 하여 천주교에 귀의하셨는가 하면, 1935년에 일본의 어느 서점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라는 책을 사서 읽고 난 뒤였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에 큰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찾은 것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깨달은 것이지요. 그래서 그분은 1937년에 목포 산정동 성당에서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해방 후에는 자신의 그 많은 땅을 소작농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1949년에 빈손으로 대구 남산동으로 이사를 왔는데 그 당시 우리 교구 제6대 교구장이셨던 최덕홍 주교님께서 김천성의여자중학교 교감으로 임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6.25 사변이 일어나 김익진 선생님은 종군기자 겸 통역장교로 일을 하게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1953년에 근화여자중학교에서 한 2년 간 교감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후 선생님은 ‘레지오 마리애 수첩’을 번역했고 ‘동서의 피안’, ‘내심낙원’을 번역했습니다. 
작년 가을에 ‘빛으로 나아가다’라는 제목으로 김익진 프란치스코에 대한 연극이 범어대성당 드망즈홀에서 올려 졌었습니다. 김익진 선생님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범을 그대로 따르고 실천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용기가 필요하고 굳은 의지가 필요하며 주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마태 28,16-20)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오늘 다시 한 번 근화여자중학교 개교 70주년을 축하드리며 그동안 학생과 학교를 위해 수고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하느님의 축복을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