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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축성생활로 부르시는 하느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종신서원미사 강론)
   2020/02/03  11:7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종신서원미사

 

2020. 02. 02. 주님 봉헌축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

 

오늘 종신서원 하시는 네 분의 수녀님들, 축하를 드리며 주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주보성인이신 성 바오로 사도께서 오늘 종신토록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수녀님들을 위하여 특별히 전구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미사 때 세 분의 수녀님들이 첫 서원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수녀님들에게도 하느님의 강복이 있기를 빕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지 40일째 되는 날,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오늘 이 날을 ‘축성생활의 날’로 정하시고 주님께 축성되고 봉헌된 수도자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기도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축성생활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기도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오늘 수도서원 예절 중에 서원자에 대한 문답이 있을 것인데 첫 질문이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형제들인 모든 사람 안에서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여러분의 온 존재를 하느님께 봉헌하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서원자들은 “예, 원합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렇게 수녀님들이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을 위하여 종신토록 자신을 봉헌하는 삶을 산다고 하여 수도생활을 ‘봉헌생활’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봉헌생활’이란 용어를 ‘축성생활’이라는 말로 변경하기로 한국 주교회의에서 결정하였습니다. 라틴어 ‘Vita consecrata’ 라는 말을 지금까지 ‘봉헌생활’이란 말로 번역하여 사용하여 왔는데, 전국남녀수도장상연합회에서 이 말의 정확한 번역이 ‘봉헌생활’보다는 ‘축성생활’로 해야 맞는다고 하면서 용어를 변경하여 줄 것을 주교회의에 건의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교회의 총회에서 몇 차례에 걸쳐서 논의를 하였지만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가 지난 12월에 있었던 주교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그 건의를 받아들여 ‘봉헌생활’이란 말을 ‘축성생활’이란 용어로 변경하기로 하였습니다.

‘축성(祝聖)’, 즉 ‘Consecratio’는 사람이나 물건을 하느님의 일에 쓰기위해 성별(聖別)하여 거룩하게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래서 수도생활을 축성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업에 쓰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세상 사람들 속에서 뽑아 거룩하게 하시는 데에 더 강점을 두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주도권을 인간의 의지보다는 하느님께 두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셨고 우리는 거기에 응답할 뿐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그렇게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축성된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거룩하게 하심에 감사드리며 사랑의 응답으로써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12월 8일에 달성군 논공에 있는 ‘대구가톨릭치매센터’ 성당에서 ‘양 수산나 여사 한국 오심 60주년 감사미사’를 드렸습니다. 양 수산나 씨를 아시지요? 영국 사람으로서 ‘수지 영거 여사’라고도 부릅니다만, 우리 교구의 최초의 ‘사도직 협조자(Auxilista)’ 중의 한 사람입니다. ‘SOS 어린이 마을’ 초대 원장을 하셨던 하 마리아 여사와, 2대 원장을 하셨던 프란체스카 여사도 사도직 협조자들이었습니다.

현재 우리 교구에 사도직 협조자가 40 여 분이 계십니다. 사도직 협조자들이 수도자처럼 공동생활을 하지는 않지만 일정 기간 양성을 받으며 주교 앞에서 서약을 하고 부름을 받습니다. 2주 전에 교구청 경당에서 한 분이 ‘3년 부름’을 받았고 또 한 분이 ‘종신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성소를 살도록 주교를 통하여 그 사람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양 수산나 씨는 1959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당시 효성여대에 줄 피아노 일곱 대를 배에 실고 한 달이 넘는 항해 끝에 부산항에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양 수산나 씨가 우리 교구와 한국교회에 기여한 공로를 다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제 연세가 80 중반이 되셨는데 지난봄에 불현 듯이 가톨릭치매센터에 들어가셨습니다. 크게 아프신 것도 아닌데 왜 치매센터에 들어가셨는가 하고 걱정을 하였는데 그곳 생활에 만족해하시고 계셔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서 옥스퍼드대학까지 졸업한 사람이 무엇 때문에 한국에 오셔서 그 고생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한 4년 전에 돌아가셔서 군위 천주교묘원에 묻혀 계시는 독일 사람 옥잉애 여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옥잉애 여사는 소화어린이집을 설립하시고 평생을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리고 가톨릭피부과의원을 세우시고 구라사업에 평생을 바쳤던 오스트리아 사람 엠마 프라이징거 여사께서도 그렇습니다. 엠마 씨도 이제 구순이 다 되어가는데 작년에 사수동의 ‘파티마 홈’에 들어가셔서 다른 어르신들과 함께 생활하고 계십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삶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 축성되고 자신을 바친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명예나 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평생 이웃을 섬기며 봉사하는 삶을 사셨지만, 어떤 특별대우를 원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생애를 마치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할 뿐이며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기만을 바랄 뿐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가 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데 우리는 모두 자기식대로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불협화음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내려놓기가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더 친절하고 조금만 더 배려하며 조금만 더 자신을 낮추면 될 것을, 그것을 우리는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직자든 수도자든 하느님께 축성되고 봉헌된 사람은 무릇 어떤 환경에서든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