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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성유 축성 미사 강론)
   2020/04/09  17:24

성유 축성 미사

 

2020. 04. 09. 계산주교좌성당

 

전통적으로 우리 교회는 성주간 목요일 오전에 교구의 모든 신부님들과 함께 주교좌성당에 모여 성유축성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런데 올해 성유축성미사에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신자들은 물론이요 신부님들까지 다 참석하지 못하시고 교구사제평의원 신부님들과 각 지역장 신부님들만 참석하였습니다. 

이렇게 한낱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의 일상이 멈추어지고, 신자들과 함께 드리는 미사까지 한 달 반 이상 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도 주님 부활 대축일에는 그동안 애타게 기다려온 신자들과 함께 ‘예수 부활하셨네.’하며 ‘알렐루야’를 힘차게 노래할 줄 기대했는데 지금은 이것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구의 모든 신부님들은 각 성당에서 신자 여러분들의 참석 없이 성삼일 전례와 주님부활대축일 미사를 조용히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장 요한 보스코 주교님은 오늘 이 성유축성미사를 시작으로 하여 오늘 저녁 8시에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와, 내일 저녁 8시에 주님 수난 성금요일 전례, 그리고 토요일 저녁 8시에는 파스카 성야 미사와, 주일 낮 10시에 주님부활대축일 낮 미사를 이곳 계산주교좌성당에서 드리고 유튜브로 생중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아쉽고 부족하기 이를 데 없지만 신부님들이 각 성당에서 혼자 드리는 미사 시간에, 그리고 저희들이 이 주교좌성당에서 드리는 성삼일 전례와 미사 시간에 영적으로 함께 하여 주시고 기쁜 부활절을 맞이하시길 기원합니다. 

 

지난 달 말부터 다행히 우리나라는 코로나 19 환자가 많이 줄어들어 머지않아 바이러스가 소멸되지 않겠나 하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유럽과 미주 지역 상황은 정말 심각한 수준입니다. 오늘날 첨단과학을 자랑하는 이 세상이 어쩌다가 이런 처지가 되었는지 많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만,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선 이 바이러스가 하루빨리 물러가도록 간절히 기도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3월 27일 저녁에 비를 맞으시며 홀로 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을 걸어가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텅 빈 광장을 바라보시며 기도하시는 교황님의 모습에서 지금의 인류가 겪고 있는 아픔을 멈추게 해 달라는 간절함이 느껴졌습니다. 

우리도 교황님과 함께 이 고난의 시간이 하루빨리 멈추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각자가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것들을 묵묵히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미사 중에 교회가 앞으로 일 년 동안 사용할 병자성유와 예비신자 성유, 그리고 축성 성유를 축성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유축성 전에 특별히 신부님들의 서약 갱신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신부님들은 자신이 예전에 사제품을 받았던 그때를 기억하며 주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제 직무에 더욱 충실할 것을 다짐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4,16-21)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시어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읽으시는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면서 있었던 일로서, 예수님께서 읽으신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은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수님께서 읽으신 이사야 예언서 61장 말씀은 원래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서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느님께서 이사야한테 내리셨던 말씀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바이러스로 인해 유배 아닌 유배생활과 다름없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산천에 아름다운 봄꽃들이 만발하였지만 어디 마음대로 여행 다니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어느 정도 진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안전을 위하여 사회적 거리두기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사람이 마주 오면 마스크를 고쳐 쓰고 사람을 피해서 지나가게 됩니다. 부모님이나 친지가 병원이나 요양원에 계셔도 잘 찾아뵙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 사는 꼴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코로나 19가 종식되고 이 유배생활에서 하루빨리 풀려나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나자렛 회당 안에서 사람들 앞에서 읽으셨던 이사야 예언서 말씀을, 우리 신부님들이 자신의 사제서품 때 했던 서약을 갱신하고 1년 동안 신자들을 위해 사용할 기름을 축성하는 이 자리에서 봉독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신부님들을 선택하시어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의 영을 보내 주시어 천상능력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사제들로 하여금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게 하셨고, 사람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입혀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부님들을 “‘주님의 사제들’이라 불리고, ‘우리 하느님의 시종들’이라 일컬어지리라.”(이사야 61,6) 했던 것입니다. 우리 신부님들이 ‘주님의 사제’로서, ‘하느님의 시종’으로서 그 소임을 다 할 수 있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지난 3월 27일 저녁 ‘인류를 위한 특별기도’에서 교황님께서 말씀하시길,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고, 모두가 연약하고 길을 잃은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모두가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들이며, 모두가 같이 노를 젓고 모두가 서로를 위로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 “주님과 타인을 향한 삶을 다시 시작하자.”고 하셨습니다. 교황님의 이 말씀에 힘입어 우리 신부님들이 앞장서서 그런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녁에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가 봉헌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께서 성품성사와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제직과 성체성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사제가 자신이 사제라는 사실을 가장 강하게 의식할 때가 어느 때인가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 미사를 집전할 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자들도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을 강하게 느낄 때가 성사를 받고 미사에 참례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 사제가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를 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어느 때보다도 서로가 서로를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신부님들이 그리운 우리 신자 분들을 만나 기쁘게 담소를 나누고 미사를 같이 봉헌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