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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 땅에 평화의 싹이 자라게 하소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미사 강론)
   2020/06/26  11:0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미사

 

2020. 06. 25. 범어대성당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로 시작하는 6.25노래를 아십니까? 요즘은 안 부르는 것 같습니다만, 옛날에 학생 때 해마다 6월 25일이 되면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모여서 조회를 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올해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는 해이고,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한 때는 ‘6.25사변’이라고도 불렀었는데 지금은 공식적으로 ‘한국전쟁’, 혹은 ‘6.25전쟁’이라고 부릅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이 갑자기 38선을 넘어 남한을 공격해온 전쟁인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3년 1개월 동안 이 한반도에서 치러진 전면전이었던 것입니다.

6.25전쟁 발생 직전, 국군과 북한군의 전력을 비교해보면 병력으로도 북한군이 배가 많았습니다. 전력 차이를 말할 때 당시 북한군에는 전차가 242대가 있었는데 국군에는 한 대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차만이 아니라 현대전에 있어서 포병 화력이 상당히 중요한데 6배의 차이가 났다고 합니다.

이런 상태였는데 1948년 8월 15일에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된 후 미군은 철수하였습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님은 1949년 6월에 안두희한테 암살되기 전에 유엔 한국위원회에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 민족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고 군대를 주둔하다가 철수한다고 하는데 내전이 일어나면 당신들(미국과 소련)에게 책임이 있다.”

미군 군정이 끝나고 미군이 철수한 것도 큰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남한 정부가 북한군의 움직임에 대한 첩보가 계속 올라왔으나 이에 대해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6월 25일이 주일이었는데 병력의 절반이 외출 외박을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한군이 남침한 지 불과 3일 만인 6월 28일에 한국 정부는 서울을 북한군에게 내주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것입니다. 7월 7일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창설되어 본부를 일본 도쿄에 두고 첫 번째로 미군 스미스 부대를 한국전에 파병하였지만 북한군에게 패전을 하고 말았습니다. 북한군은 남침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 왔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함락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낙동강 전선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 모릅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버텨주었기 때문에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계획될 수 있었고 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장사리 상륙작전’을 아십니까? ‘장사리’는 영덕 장사해수욕장이 있는 동네를 말하는데,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기만 작전으로 장사리 상륙작전을 펼쳤고, 그래서 그 장사리에서 우리의 국군과 학도병들이 많이 희생되었던 작전이었습니다. 최근에 장사해수욕장 옆에 큰 군함 모형으로 기념전시관을 세웠는데 얼마 전에 개관했다고 합니다.

하여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고, 국군과 유엔군은 북으로, 북으로 밀고 올라갔습니다. 10월 10일에 원산을 점령했고, 10월 19일엔 평양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래서 다급해진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다다랐을 즈음인 10월 25일에 중국이 대대적인 병력을 지원하여 북한군과 함께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데 후퇴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12월 4일에 평양에서 철수했고 12월 14일부터 흥남철수작전을 시작하였습니다. 흥남철수작전은 민간인 철수작전이 아니라 퇴각하는 미군을 해상을 통하여 철수시키는 작전이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 오키나와에 정박하고 있던 미국선적의 화물선 빅토리아호가 이 작전에 동원되었다가 14000명이라는 민간인 피난민들을 태워서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아침에 거제도에 내려놓았던 사건은 기네스북에 올라갈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지난 1월 1일 미사 강론 때도 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 빅토리아호의 선장이 ‘레너드 라루’라는 사람인데, 그분은 그 엄청난 일을 하고 난 후인 1954년에 미국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를 하여 평생을 평범한 수사님으로 사시다가 2001년에 87세의 일기로 선종하셨습니다.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서는 이 분의 삶이 너무나 훌륭해서 시복청원을 하겠다고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여튼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합세와 공격으로 인하여 북한에서 퇴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통상 ‘1.4후퇴’라고 합니다. ‘1.4’라는 말은 1951년 1월 4일이라는 말인데, 바로 그날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수도 서울을 포기하고 퇴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서울은 북한군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북한군과 중국군은 오산과 장호원, 제천, 삼척까지 남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국군과 유엔군이 전열을 다시 정비하여 대반격을 시작하였고, 드디어 3월 14일에 서울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그 후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2년 이상 계속되다가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밤 10시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던 것입니다.

영화 ‘고지전’을 보셨나요? 고지 하나를 두고 국군과 북한군이 혈전을 벌이는 영화입니다. 아마도 ‘백마고지’를 말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는데, 왜 ‘백마고지’라고 하는지 아세요? 원래는 해발 395M 고지라서 ‘395고지’라고 불렀는데, 그 고지 하나를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수만 발의 포탄과 총알이 떨어져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없는 민둥산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백마가 쓰러져 누워있는 모습으로 보여 그 후부터 ‘백마고지’라 불렀고 그 전투에서 이긴 보병 제9사단을 ‘백마부대’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상이 6.25전쟁의 개요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피해를 생각하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수백만의 사상자들과 천만 명의 이산가족들의 아픔과 설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부님들만 해도 약 68명의 신부님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작년 여름에 강원도 양양에 있는 예수고난회 피정의 집에서 2박3일간 휴가를 한 적이 있습니다. 피정의 집 옆으로 ‘이광재 티모테오 길’이라는 순례길이 있었습니다.

이광재 신부님은 1939년부터 양양성당 주임신부님이셨는데 1945년에 38선이 그어짐으로써 양양성당은 이북 땅이 되었습니다. 이북이 공산화가 되면서 평강과 원산의 신부님들이 체포되어 갔기 때문에 그 넓은 땅이 이광재 신부님의 사목 구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광재 신부님이 목자 없는 평강 지역 신자들을 만나러 갔다가 공산군에 체포되어 원산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 10월 8일 밤에 공산군이 국군과 유엔군에게 밀려 북으로 퇴각하면서 포로들을 산중턱으로 끌고 가 방공호에 들어가게 해놓고 총을 쏘아댔던 것입니다. 그 사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총을 맞고 죽어가면서 ‘살려 달라.’ ‘물을 달라.’ 고 하는데 ‘제가 가겠어요. 기다리세요. 제가 물을 드리겠어요.’라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목소리 주인공이 바로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님이셨다고 합니다. 당신도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 끝까지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착한 목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6.25 후에 왜관에 자리를 잡기 전에는 북한의 함경남도 덕원에 있었습니다. 수도원이 1909년에 독일에서 한국으로 진출하였는데, 처음에는 서울 백동(지금의 혜화동)에 있다가 나중에 원산 근처의 덕원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함경도와 연길까지 사목을 맡아 하고 있었는데, 중국과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6.25 전후로 해서 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신앙 때문에 목숨까지 잃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분도 수도원에서는 그 당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38분을 시복하기 위해 교황청에 청원을 하였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당시 흥남본당의 주임신부를 했던 구대준 가브리엘 신부님이십니다. 작년이 시인 ‘구상 선생님 탄생 100주년’이라고 칠곡군과 왜관 수도원에서 행사도 했습니다만, 하느님의 종 구대준 신부님이 구상 선생님의 형입니다. 구상 선생님도 원래 이름이 ‘구상준’입니다.

구상 선생님은 1951년 1.4후퇴 때 대구로 내려와 살게 되었는데 그 해 낸 첫 시집 제목이 ‘구상’이었습니다. 시집 속표지에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북한의 공산당들이 2년 전에 납치하였다가 이제는 그만 순교하였을 나의 오직 하나의 형 대준 신부의 이름으로 이 시집을 올리나이다.”

구상 선생님은 1955년부터 한 20년 간 왜관에서 살았습니다. 부인이 의사라서 왜관에서 오랫동안 ‘순심의원’을 개원하고 있었습니다.

구상 시 중에 ‘焦土의 詩’라는 연작이 있는데 1956년에 시집으로 출판을 하였고 이중섭 화가가 표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중섭 선생님은 6.25전쟁 전까지 원산사범학교 미술 선생님을 하셨기 때문에 두 분이 젊을 때부터 잘 알고 있었고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초토의 시 10’을 잠깐 들어보겠습니다. ‘焦土’란 말은 ‘불에 검게 타버린 땅’이라는 말입니다.

 

“조국아, 심청이 마냥 불쌍하기만 한 너로구나.

시인이 너의 이름을 부를 양이면 목이 멘다.

(중략)

조국아, 거리엔 희망도 절망도 못하는

백성들이 나날이 환장해만 가고

너의 원수와 그 원수를 기르는 벗들은

너를 또 다시 두 동강을 내려는데

너는 오직 생각하며 쓰러져가는 갈대더냐.

원혼의 나라 조국아,

너를 이제까지 지켜온 것은 비명뿐이었지.

여기 또 다시 너의 마지막 맥박인 듯

어리고 헐벗은 형제들만이 북으로 발을 구르는데

먼저 간 넋을 풀어줄 노래 하나 없구나.

조국아, 심청이 마냥 불쌍하기만 한

조국아!”

 

구상 선생님은 휴전으로 분단이 고착되는 조국을 ‘심청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친 심청이처럼 조국도 전쟁을 끝내기 위해 국토를 남북으로 두 동강 내는 희생을 치르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후 70년,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김대중 대통령 때,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때도 남북정상이 만났습니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들어와서 남북정상회담이 세 차례나 있었고 또 북미정상회담도 세 차례 있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될 듯 될 듯 기대를 잔뜩 하였는데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정말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의 정성과 기도가 부족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안에서 남남 갈등이 너무나 심합니다. 상대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목소리만 내고 있습니다. 나라를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몫을 차지하는 데 더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신명기 30,1-5)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내 욕심이 아니라 하느님 뜻과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다짐하며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더욱 더 기도를 열심히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더 이상 전쟁이 없이 진정한 평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기도와 정성과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루르드의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와 우리나라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성인성녀와 복자들이여, 저희와 우리나라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