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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천주교회의 큰 씨앗 (욱수본당 25주년 기념미사 강론)
   2020/07/06  11:21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 및

욱수본당 25주년 기념미사

 

2020. 07. 05.

 

먼저 욱수본당 설립 25주년을 축하드리며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욱수본당은 대구 시지와 신매 지역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1995년 2월 17일에 고산본당에서 분가되어 설립되었습니다. 그 후 3년 뒤에는 매호본당이 분가되었고, 그 해 성전 건립을 시작하여 2000년 5월 7일에 이문희 대주교님께서 오셔서 새 성전을 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당 설립 10년이 되던 해에 비안네 유치원을 설립하여 그 이듬해 완공과 함께 축복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본당이지만 그동안 사제가 6분이 나왔고, 수도자도 많이 배출되었으며 신학생도 현재 6명이라는 사실을 볼 때, 욱수본당이 이 지역의 중심본당으로서 지역사회 복음화의 거점본당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본당 설립 초창기부터 많은 희사와 헌신과 봉사를 아끼지 않으신 교우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복락으로 갚아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지난 25년 동안 본당발전과 지역사회 복음화를 위해 애쓰셨던 역대 신부님들과 총회장님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모든 교우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은 연중 제14주일이지만 ‘욱수본당 설립 25주년 감사미사’ 겸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로 드립니다. 왜냐하면 오늘 7월 5일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축일이기 때문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 아시지요?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면서 뛰어난 성덕과 모범을 보여주신 성인이십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가문은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온 후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천주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 신부님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여 복자가 되셨고, 1815년 을해박해 때 대구에서 순교하신 김종한 안드레아 복자가 김신부님의 종조부가 되십니다. 그리고 김신부님이 마카오에서 유학 중에 있는 동안에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모인 김 데레사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여 성인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김대건 신부님의 집안사람 중에 적어도 10명 이상이 순교를 하였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김대건 신부님은 1836년에 15살의 나이로 사제가 되기 위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 당시 그 먼 길을 어떻게 갔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해 12월 3일에 조선을 떠나 이듬해 6월 7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고 하니 6개월이 조금 더 걸린 거죠. 그런데 유학 간 지 얼마 안 되어 최방제는 황토병에 걸려 하늘나라로 먼저 떠났습니다. 거기다가 마카오에 내전이 일어나 필리핀으로 피난을 갔다 오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전쟁이나 전염병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난리인데 그 당시에는 얼마나 위험한 일이 많았겠습니까!

1842년에 김대건과 최양업은 각자 마카오를 떠나 중국 길림성의 소팔가자(小八家子)로 향합니다. 몇 개월 후 소팔가자에 도착하여 공부를 계속하다가 1844년 12월 15일에 두 사람은 페레올 고 주교님으로부터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작년 10월에 중국 동북삼성에 있는 안중근 토마 의사 유적지를 순례하는 길에 장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소팔가자 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미사를 드리는데 감개무량하였습니다. 그 성당 뒤뜰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큰 동상이 서 있습니다.

김대건 부제님은 조선의 사정을 살피고 중국에 있는 페레올 주교님과 신부님들을 모시고 올 방법을 찾기 위해 만주를 거쳐 조선에 몰래 입국하였습니다. 1845년에 조선에 몇 개월 머무는 동안 여러 신자들을 만났고 그 중 열심한 신자들 몇 사람을 데리고 배를 한 척 구하여 서해를 통하여 중국 상해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상해에 도착한 후 그 해 8월 17일에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습니다.

사제품을 받고 난 후 김 신부님은 조선에서 타고 왔던 배 라파엘호를 고쳐서 페레올 주교님을 모시고 조선 신자들과 함께 서해를 건너서 조선으로 들어오는데 풍랑에 밀려 고생하다가 제주도 차귀도에 도착하게 됩니다. 제주 용수포 성지에 가면 그 라파엘 호를 재건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김 신부님 일행은 그 부서진 배를 다시 고쳐서 육지로 올라오는데 도착한 곳이 금강 하구의 나바위라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김 신부님은 조선에 들어와 전교를 하시다가 다시 중국에 대기하고 있는 신부님들을 모셔오기 위한 해상 통로를 알아보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수차례의 문초를 받고 1946년 9월 16일에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셨던 것입니다.

페레올 주교님은 김 신부님의 순교 소식을 전해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김 신부님을 만나 본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열렬한 신앙심과 성실한 마음에 존경과 사랑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어떤 일도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고, 늘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조선교회에서 그를 잃은 것은 큰 슬픔이자 불행이 됐습니다.”

페레올 주교님의 말씀처럼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는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김 신부님의 그 짧은 생애는 한국천주교회의 큰 씨앗이 되었고 한국의 모든 성직자들의 큰 귀감이 되었던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한국인 첫 사제인데 그동안 한국인으로서 사제서품을 받은 사제 숫자는 지난 3월 1일자로 6601명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선종하신 분들과 환속하신 분들을 제외하고 살아계신 신부님들의 숫자가 5500여 분이 될 것입니다. 모두가 김 신부님의 후예들입니다. 이 분들이 참으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본받아 사제로서 잘 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7월 5일이 왜 김대건 신부님의 축일이 되었느냐 하면, 김 신부님이 1925년 7월 5일에 복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 날 로마 교황청에서 당시 조선교회의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 79위가 시복되었던 것입니다.

내년, 즉 2021년은 성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내년을 희년으로 지내기로 하고 한국천주교회 차원에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감염되고 고통을 받고 목숨까지 잃기도 합니다. 그 중에 또 한 가지 걱정되고 우려되는 것은 신자들이 성당에 잘 못 나오고 하니까 상황이 호전이 되어도 주일 지키는 것을 소홀히 여기고 성당 안 나오는 것이 습관화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순교자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참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신부님은 말씀하시길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태어난 보람이 무엇인가? 그를 알아보았으되 배신하면 차라리 이 세상에 아니 난 것만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김 신부님의 ‘임자’라는 이 표현은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주님’이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세상 만물과 우리들의 주인이시며 절대권을 갖고 계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 바로 ‘임자’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의 ‘임자’임을 알았으면 그분을 배반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26세의 젊은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생명을 바쳐 순교의 길을 걷도록 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김 신부님께서 옥중에서 교우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한 구절을 마지막으로 듣고 묵상해 봅시다.

“나는 비록 갇힌 몸이 되어 곧 죽을 것이지만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사랑으로 도우며 사시길 바랍니다. 천주께서 새로운 목자를 보내주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한 몸을 이루다가 모두 천국에서 만나 영원히 같이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