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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사제들의 직무 (성유 축성 미사 강론)
   2021/04/01  16:43

성유 축성 미사

 

2021. 04. 01. 성주간 목요일 10시 주교좌범어대성당

 

오늘 우리는 성유축성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이 미사 중에 신부님들의 서약 갱신이 있고, 이어서 성유축성이 있습니다. 교회가 앞으로 일 년 동안 사용할 병자성유와 예비신자 성유, 그리고 축성성유를 축성하는 것입니다.

병자성유는 사제가 병자성사를 집전할 때 병자에게 바르는 성유이며, 예비신자 성유는 세례성사 때 예비신자를 위한 구마기도를 바치고 바르는 기름입니다. 그리고 ‘크리스마 성유’라고도 하는 축성성유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와 성품성사를 집전할 때 성사를 받는 사람에게 바르는 성유입니다. 이 축성성유는 성당과 제대 축성 시에도 사용됩니다.

작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서 주교좌계산성당에서 사제평의회 의원 신부님들만 참석한 가운데 미사를 드리고 온라인으로 중계를 하였습니다. 올해는 조금 나아졌습니다. 그래서 좌석 수의 30% 정도 참석할 수 있으니까 대부분의 신부님들과 일부 신자 분들이 참석하신 것 같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모두가 힘이 듭니다. 격리 아닌 격리 생활을 한 지가 1년이 넘었습니다. ‘격리’를 영어로 ‘Quarantine’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40’이란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지난 사순시기 동안 우리가 기도와 자선과 절제의 삶을 살았는지를 돌아보며 주님의 부활을 기쁘게 맞이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여튼 엄밀하게 말해서 오늘 ‘성주간 목요일’로서 사순시기가 끝납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 주님만찬미사부터 주님부활대축일까지를 특별히 ‘파스카 성삼일’이라고 합니다. 일 년 중 가장 거룩하고 뜻깊은 기간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정성을 다해 전례에 참석하여 구원의 은혜를 받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매일 묵주기도를 바칠 때, 세 가지 지향을 꼭 생각하며 바칩니다. 첫째는 우리 교구를 위하고, 둘째는 우리나라에 평화가 정착되기를 원하며, 셋째는 코로나19가 하루빨리 물러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그런 지향을 가지고 기도를 하시고 계시겠지만 더욱 더 정성을 모우면 좋겠습니다.

교우 여러분들은 우리 교구를 생각하면서 저와 우리 신부님들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세상 안에서, 온갖 유혹 가운데서 기름 부음 받은 사제로 살아가려는 귀한 뜻을 잘 지켜갈 수 있도록 여러 교우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올해로 사제서품 50주년 금경축을 맞이하시는 정대식 플로리아노 신부님과 김부기 가브리엘 신부님, 그리고 이성배 사도요한 신부님을 위해서도 특별히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정순재 베드로 신부님과 전주원 바오로 신부님께서는 올해로 서품 60주년 회경축을 맞이하시는데, 제가 부활절을 지내고 찾아뵙고 축하를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회경축을 맞이하시는 이 두 분의 원로 신부님들도 기억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성유축성미사는 우리 신부님들이 받은 성품성사를 기념합니다. 축성성유와 예비신자성유, 병자성유는 사제가 어떤 직무를 가지고 사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부님들이 미사와 성사를 잘 준비하고 정성을 다하여 집전하여야 할 것이며,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질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뿐만 아니라, 소외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살피고 돌보는 자비의 마음을 늘 간직하며 ‘착한 사마리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성유축성미사가 가지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미사의 성찬전례에 바칠 감사송은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사제들의 직무’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간 부분을 미리 보면 이렇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외아드님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어,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대사제로 세우시고, 오묘한 섭리로 성직을 마련하시어, 교회 안에 단일한 사제직이 보존되게 하셨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소유가 된 백성을 임금의 사제직으로 돌보시고, 형제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뽑으시어, 안수로 당신의 거룩한 직무에 참여하게 하셨나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류 구원의 제사를 새롭게 하며, 주님의 자녀들과 파스카 잔치를 거행하고, 거룩한 백성을 사랑으로 이끌며, 말씀으로 기르고 성사로 거룩하게 하나이다. 또한 그들은 형제들의 구원과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놓으며, 그리스도의 모습을 애써 닮고, 끊임없이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보여 주나이다.”

이 감사송 말씀은 오늘 복음말씀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사제들의 사제직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사제의 직무가 무엇인지를 아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감사송에 나오듯이 우리 신부님들이 ‘형제들의 구원과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놓으며, 그리스도의 모습을 애써 닮고, 끊임없이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사람들에게 줄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우들은 신부님들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올해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입니다. 그리고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탄생 200주년’이기도 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우리 신부님들이 자신의 사제직을 기쁘게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전구해 주시기를 빕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에 충남 당진 솔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올 8월 21일에 교구 내 모든 본당에서 기념미사를 봉헌하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그날 계산주교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예정입니다.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1821년 3월 1일에 충남 청양 다락골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지난 3월 1일에 성모당에서 탄생 2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김대건과 최양업 두 신학생은 1844년 12월 15일에 중국 길림성의 교우촌 소팔가자에서 제3대 조선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재작년 10월에 교구 평신도위원회 상임위원들과 함께 중국 동북삼성에 있는 안중근 토마스 의사 유적지를 순례하는 중간에 길림성의 장춘시에서 그리 멀지 않는 소팔가자 성당에 들려 미사를 드렸었는데, 정말 감개무량하였습니다.

당시 최양업 부제와 김대건 부제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조선으로 입국하는 길을 개척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김대건 부제가 먼저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을 하였고, 얼마 후 배를 하나 구하여 조선의 신자들과 함께 서해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건너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페레올 주교님은 1845년 8월 17일에 중국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김대건 부제를 사제로 서품하였고 김대건 신부님이 타고 온 그 배를 고쳐 다시 조선으로 입국하는 데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은 그 이듬 해 5월 12일에 관원들에게 체포되었고 9월 16일에 서울 새남터에서 참수 치명하셨던 것입니다.

중국에 남아서 친구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소식을 전해들은 최양업 신부님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최양업 신부님이 왜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사제서품을 받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1845년 5월 25일에 극동대표부의 리브아 신부님께 쓴 메스트로 신부님의 편지를 보면, 페레올 주교님과 최양업 부제 사이에 약간의 갈등이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여튼 조선으로 입국하는 길도 찾지 못하였고 사제서품도 미뤄진 자신의 그런 처지에 대하여 최양업 부제는 전혀 누구를 원망하거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선에서 보내온 ‘기해 및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내었고, 그것이 다시 교황청 시성성에 보내져서 1925년 7월 5일에 ‘기해 및 병오박해 순교자 79위’가 시복되는 큰 기쁨을 한국교회에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조선 순교자 79위가 시복되는 데 있어서 최양업 신부님의 업적이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김대건 신부님보다 4년 가까이 늦게 사제서품을 받고 1849년 12월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당시 유일한 조선인 사제였기 때문에 경기도 이남의 거의 모든 교우촌들이 당신의 사목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51년 10월 15일에 쓴 편지에 의하면 최신부님이 맡은 교우촌이 127곳이며 신자가 5936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수는 당시 전체 조선 신자 수의 반이 넘는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산길을 다녔겠습니까! 때로는 3-4명의 신자들이 있는 곳으로도 이틀, 혹은 사흘을 걸어가서 성사를 주기도 하였습니다.

밤새워가며 걷고 또 걷던 길목에서 결국 최양업 신부님은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소식을 듣고 배론에서 급히 달려온 푸르티에 신부님에게 병자성사를 받으시고 “예수, 마리아”를 되뇌던 신부님은 1861년 6월 15일에 하느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올해로 최 신부님이 선종하신 지 160주년이 됩니다.

당시 제4대 조선대목구장이신 베르뇌 주교님께서 1861년 9월 4일자로 파리외방전교회 바랑 신부님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최양업 신부님이 박해시기 조선 교회에 얼마나 귀한 사제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굳건한 신심과 영혼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 훌륭한 판단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됐던 유일한 조선인 신부 최양업 토마스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은 뒤 저에게 자기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로 오던 중 지난 6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 토마스 신부는 12년 동안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최양업 신부님은 ‘양업’이란 당신의 이름처럼 선량한 업적을 쌓았던, 참으로 성실한 사제였던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땀의 순교자였고, 길 위의 참된 목자였습니다.

오늘 최양업 신부님에 대하여 다소 길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 김대건 신부님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또한 이야기할 기회가 많지만, 최양업 신부님에 대해서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참으로 자랑스러워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성직자들이 이 두 분을 큰 귀감으로 삼고 따라야 할 분임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살았으면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