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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주님부활대축일 낮미사 강론)
   2021/04/08  12:5

주님부활대축일 낮미사

 

2021. 04. 04. 범어대성당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리시는 은총과 사랑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길 빕니다.

일제 강점기 때 대구의 이상화 시인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읊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빼앗긴 일상이지만, 계절의 봄과 함께 주님의 부활도 어김없이 왔습니다.

 

영어권에 있는 사람들이 성탄절에 나누는 인사말이 “메리 크리스마스( Merry Christmas)”입니다. 그리고 부활절에 나누는 인사말은 “해피 이스터(Happy Easter)”입니다. 부활달걀을 ‘Easter Egg’라고 합니다.

성탄절을 뜻하는 ‘크리스마스’라는 말도, 그 어원에는 탄생의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활절을 뜻하는 ‘Easter’라는 말도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동쪽, 동풍’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절을 라틴어로는 ‘파스카(Pascha)’라고 하고, 이탈리아어로도 ‘Pasqua’라고 합니다. 그 뜻은 ‘건너가다.’ ‘지나가다.’라는 뜻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영어권에서 부활절을 왜 ‘Easter’라고 했는지 궁금해집니다.

복음서를 보면 네 복음서 모두 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혹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포함한 몇몇 여인들이 무덤에 갔더니 무덤은 비어있었고, 얼마 후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주간 첫날’이 무슨 요일입니까? 일요일입니다. Sunday입니다. 안식일 다음 날이고 주간 첫날인 일요일에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일요일을 ‘주님의 날’ 즉, ‘주일’이라고 부르고 주일미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대축일은 주일 중에 주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아침 일찍 동쪽에서 빛이 비치기 시작할 때 부활하셨다고 하여 부활절을 ‘Easter’라고 부르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말이라는 것이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였는지가 중요하고, 그 말이 굳어져서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이 24절기로는 ‘청명(淸明)’입니다. 날이 푸르고 맑다는 뜻인데 오늘은 봄비가 내립니다. 청명은 춘분과 곡우 사이에 있는 절기로서 날씨가 좋기 때문에 농부가 논밭갈이를 하며 농사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내일은 ‘한식(寒食)’입니다. 한식은 설날, 단오, 추석과 함께 옛날 우리 민족의 4대 명절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은 한식과 단오를 잘 지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한 10여 년 전에 중국에 갔다가 ‘면산’에 올라간 적이 있는데, 가이드가 한식의 유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애틋한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중국 춘추시대에 진나라에 ‘중이’라는 왕자가 있었는데 왕위 다툼에서 밀려나 이웃 나라로 망명을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왕자가 하도 고기를 먹고 싶어 하여 ‘개자추’라는 부하가 자기 넓적다리 살을 베어 요리를 하여 대접을 하였습니다.

어느덧 망명생활이 끝나고 왕자 중이가 진나라의 왕 ‘문공’으로 옹립됨에 따라 왕은 옛날의 충신들에게 한 자리씩 주면서 포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논공행상 중에 개자추가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개자추는 낙향하여 홀어머니를 모시고 면산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임금이 뒤늦게 개자추를 생각하고 사람을 보내어 개자추를 입궐하도록 불렀지만 개자추는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면산 한쪽에 불을 지르면 개자추가 산에서 내려올 것이라고 생각되어 그렇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을 모시고 있던 몇몇 간신들이 개자추가 입궐하면 자신들의 자리가 편치 않다고 생각하여 면산 한쪽만이 하니라 반대편에도 불을 붙여 온 산이 다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개자추는 홀어머니와 함께 서로 껴안고 버드나무 아래에서 타 죽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죽은 개자추를 애통해 하면서 임금은 온 나라 백성에게 이 날은 불을 지피지 못하게 하고 ‘한식,’ 즉 ‘찬 음식’만 먹도록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유래가 되어 명절 ‘한식’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 ‘한식’이 되니까 보통 4월 5일, 아니면 6일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4월 5일이 식목일이고 예전에는 공휴일로 지냈기 때문에 등산객들이나 성묘객들에 의한 실화로 산불이 제일 많이 나는 날이 아이러니하게도 한식날이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주님 수난 성지주일’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예수님의 수난기를 들으면서 제자들의 배반과 유다 백성의 지도자들의 위선과 대중들의 무지와 몰이해, 그리고 빌라도의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멍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의 세력이 승리하지는 못 할 것입니다. 종국에는 빛이 밝아오고 사랑이 승리할 것입니다.

그 모든 폭력과 고통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당신 사랑의 길을 끝까지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랑의 끝이 어떠한지에 대하여 오늘 성경말씀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요한 20,1-9)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막달레나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알렸고 그 두 사람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었기 때문에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습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베드로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베드로로 하여금 먼저 들어가서 보게 하고, 요한도 이어서 안에 들어가 보고 믿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보고 믿었다’고 하는데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었다고 하는지, 혹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이 비어있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는지 모르겠습니다.’고 한 말을 믿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모를 일이지만 후자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말한 대로 예수님께서 안 계신, 빈 무덤을 눈으로 확인하고 믿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여튼 요한복음 20장 10절 이하를 보면, 두 제자는 빈 무덤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집에 가지 않고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울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어떤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셨지만 예수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마리아는 그 사람이 정원지기인 줄 알고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고 마리아는 “라뿌니!”하고 불렀습니다. 정말 드라마틱한 만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볼 때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극적으로 만나고 난 뒤 곧장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우리도 세상 사람들에게 가서 외쳐야 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우리나라와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