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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미사 강론)
   2016/12/12  17:17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2016. 12. 08. 성모당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1831년에 북경교구에서 독립시켜서 조선교구를 설정해주신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께서 1841년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성 요셉과 함께 조선교회의 수호자로 선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한국천주교회의 주보축일이라 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해서 한국교회와 그리고 이 혼란스러운 우리나라를 잘 이끌어 주시도록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간절히 빌어야 하겠습니다. 
 
교황 비오 10세께서 1911년 4월 8일에 조선교구를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로 분리 설정하시고 대구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안세화 드망즈 주교님을 임명하셨습니다. 드망즈 주교님께서는 1911년 6월 11일에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주교서품을 받으시고 6월 26일에 대구에 부임하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대구에 오셔서 처음 맞이하는 주일인 7월 2일에 ‘루르드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교구주보로 선포하시고 성모님께서 신설교구의 주교관 건립과 주교좌성당의 증축, 그리고 신학교 설립을 도와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주교님께서는 이 세 가지가 다 이루어지면 주교관 경내에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 성모당을 지어 봉헌할 것을 허원하였습니다. 
드디어 몇 년 후 그 세 가지가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안주교님께서는 이 자리에 성모당을 지어서 1918년 10월 13일에 봉헌하셨던 것입니다. 
성모당 동굴 위에 이런 라틴말이 적혀있습니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이 말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에 대한 서원에 의하여’ 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원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대한 서원에 의하여 이 성모당을 봉헌한다.’ 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면 ‘루르드의 성모님’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이 어떤 연관이 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잉태되신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믿음은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던 전승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854년 12월 8일에 비오 9세 교황께서 이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직접 발현하시어 이것이 사실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프랑스의 산골 마을인 루르드에서 당시 14세의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나타나신 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루르드에서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소녀 베르나데트한테 18번 발현하셨습니다.
1858년 3월 25일 목요일 아침에 베르나데트가 동굴에 갔더니 역시 허리에 푸른 띠를 두르고 흰 옷을 입은 젊은 부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 부인한테 베르나데트가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을 알아오라고 하는데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 여인은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르나데트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대로 외워서 본당신부님한테 달려가서 이야기하였더니 본당신부님이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산골에서 자란 양치기 소녀이기에 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그녀가 그 말을 알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을 예전에는 ‘무염시태’라고 했습니다. 죄에 물들지 않고 수태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분이시기에 원죄와는 무관하게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죄는 무엇입니까? 보통으로 원죄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지은 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하느님께서 따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다 따 먹어도 좋다. 그러나 이 선악과만은 따 먹지 말라.”하셨는데 그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선악과 하나 따 먹었다고 그렇게 큰 벌을 주실 수 있느냐?’ 하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다 따 먹어도 좋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입니다. ‘그러나 이 선악과만은 따 먹지 말라’는 것은 그 자유가 방임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는 하나의 제한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제한을 참지 못합니다. 열 개 중에서 아홉 개 자유를 줬는데 그 한 가지 제한을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라는 것은 하지 아니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죄는 단순히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거역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을 거역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거역하면 죄와 죽음과 멸망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사람을 찾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그런데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서 그렇게 물었겠습니까? ‘너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느냐? 나와 어떤 상태에 있느냐? 너의 이웃과, 그리고 너 자신과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죄는 너와 나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어떻게 관계가 단절되는지 오늘 제1독서는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담은 ‘하와가 그 선악과를 따서 주기에 먹었을 뿐’이라고 하면서 하와에게 탓을 돌리고 있습니다. (성인 남자의 목 중간에 후두 연골이 여성보다 유난히 좀 튀어 나온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우리말로 ‘결후(結喉)’, 혹은 ‘울대뼈’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어로는 이것을 ‘Adam’s apple’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하와가 따 주는 선악과를 한 입 배어먹기는 하였는데 걱정이 되어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목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와는 ‘뱀이 저를 꾀어서 따 먹었다’고 하면서 뱀에게 탓을 돌립니다. 
이것이 원죄의 결과입니다. 어느 누구도 ‘내 탓’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네 탓’이라고만 합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는 다툼과 싸움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 한 마디가 이 세상에 구원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말씀 한 마디가 이 세상에 구세주를 낳게 하였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이 세상에 죄와 죽음이 왔지만 그러나 또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이 세상에 용서와 구원이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벗어버리고 순결과 순명의 정신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이 주어질 것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와 저희 교구와 우리나라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