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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든 것은 신학교에서부터 (독서직 및 시종직 수여미사 강론)
   2014/03/06  9:54
독서직 및 시종직 수여미사

2014. 02. 28

 

 찬미예수님!

 오늘 독서직과 시종직을 받게 되는 신학생 여러분들(독서직 ; 대구 15명, 안동 2명, 분도회 1명. 시종직 ; 대구 13명, 안동 4명), 미리 축하드리며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독서직과 시종직을 받을 준비를 해왔고, 또 원장신부님께서 여러분들이 독서직과 시종직을 받을 만하다고 증언해 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교회 장상이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오늘 드디어 직수여식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독서직’이 무엇입니까? 글자 그대로 성서를 읽는 직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옛날에 칠품이 있을 때는 ‘강경품’이라 했는데 아마도 성경을 강독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조금 후에 제가 독서직 수여를 위한 축복기도를 바칠 텐데, 거기에 독서직의 의미가 잘 나와 있습니다. 

 그 기도 내용을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기 위하여 말씀이신 당신 외아드님을 저희에게 보내주셨으니, 독서직을 받을 형제들을 축복하시어 이들이 당신의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며, 그 참 뜻을 깨달아 장차 다른 형제들에게 충실히 전해줄 수 있게 해주십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며 그 참 뜻을 깨달아 삶으로써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종직’은 무엇입니까? 글자 그대로 시종처럼 주님의 제단에 봉사하는 직분입니다. 시종직의 의미도 주교의 축복기도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 기도 내용을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드님을 생명의 양식으로 당신 교회에 주셨으니 당신이 시종직을 맡기시려고 몸소 뽑으신 형제들에게 축복을 내리시어, 이들이 거룩한 제단에 봉사하며 생명의 양식을 다른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고, 믿음과 사랑을 길러 교회 건설에 도움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독서직과 시종직은 한 마디로 말씀과 성체에 봉사하는 직분입니다. 말씀과 성체는 우리가 매일 받아 모셔야 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말씀을 먹고 성체를 받아 모셔야 우리의 영신 생명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성체는 우리 신앙생활의 원천이요 핵심입니다. 이렇게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에 봉사하는 직분이 바로 독서직이요 시종직이기에 참으로 중요한 직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까지 사십 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였습니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 온갖 시련과 유혹과 싸움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성장하며 제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이 신학교도 어찌 보면 ‘광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만 7년 동안 하게 되는데, 그것도 중간에 군대도 갔다 와야 하고, 또 1년 동안은 삶의 현장에 파견되어 ‘복음화과정’도 해야 하는 등 신학교의 모든 과정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 년 동안 겪었던 광야생활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 8장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만나를 먹게 해주신 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2-3)

 광야와 같은 이 신학교 생활을, 어느 누구도 그러하지 않겠지만,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곳에서 배우고 익힌 지식과 덕성과 생활습관이 사제가 되어서도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나는 이런 사제가 되겠다.’고 하는 이상적인 사제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이상적인 사제상을 사는 노력을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제가 되면 잘 해야지’가 아니라 지금부터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잘 해야 나중에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제는 정결과 독신을 지키며 혼자 삽니다. 그러나 결코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고 신자들과 함께 살며 동료들과도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지난해 7월 6일 바티칸의 ‘바오로 6세 홀’에서 신학생들과 여러 수도회 수련자들에게 하신 훈화에서 말씀하시기를, ‘영성적인 삶, 지적인 삶, 사도직의 삶, 그리고 공동체적인 삶이라는 네 가지 기둥 위에 성소를 건설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황님께서는 ‘최악의 신학교가, 신학교가 전혀 없는 것보다 낫다.’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는 우리들에게 공동체적인 삶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적인 삶에 있어서 우정의 관계와 형제애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며 한 마디로 동료들 간에 험담하지 말 것을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 당신 자신도 과거에 그런 잘못을 여러 차례 저지른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꼭 해야 될 말이 있다면 장상께 이야기하고 주교님한테 이야기하라고 하십니다. 문제를 바로잡아줄 수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대개 험담 뒤에는, 험담 저변에는 시기와 질투, 야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신학교에서 동료들과 함께 살아가는 좋은 습관을 기르지 않으면 신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지난 주 어느 삼종기도 때에도 신자들에게 서로 험담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험담이 처음에는 사탕처럼 달콤하지만 나중에는 독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험담하지 않으면 우리도 성인들처럼 거룩해질 수 있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적인 삶이고 형제애이며,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마르 1,35-39)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새벽 일찍 일어나셔서 외딴 곳에 가서 기도하셨고, 아침이 되자 제자들에게 “다른 고을에도 가자. 그곳에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고 하시면서 다시 길을 떠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주된 모습은 ‘복음을 선포하는 예수님,’ ‘선교하는 예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작년 11월에 발표하신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 보면, 오늘날 교회가 깨지고 상처가 나더라도 더욱 더 사목적이고 더욱 더 선교적인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면서 사제들에게는 모두가 기도하는 선교사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학생들은 신학교에서부터 사제요 선교사로서의 자질과 능력과 자세를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삶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알게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