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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된 희망원정대 (레인 맨)
   2017/11/23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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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이번 토요일(25일) 밤 10시 55분, EBS 세계의 명화에서 미국영화 '레인 맨'을 방영한다기에 지난 2006년에 쓴 글을 올려봅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된 희망원정대

 

  십자가를 안테나로!

  2006년 병술년 새해 아침에 텔레비전에서 신년 특집으로 방영된 ‘2006 희망 원정대 아, 킬리만자로’를 보고 큰 감동과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얼마 전에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를 엄홍길 등반대장이 휠체어를 탄 중증 장애인을 포함한 다수의 지체장애자 원정대를 이끌고 험한 산을 등반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사회적 편견과 신체의 불편등을 마치 ‘산너머 산’처럼 어쩔 수 없이 감수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열심히 그 산을 오르는 모습은 마치 헤밍웨이의 소설에 나오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그리고 영화 ‘레인 맨’에 나오는 자폐아이자 천재인 형을 연상케 했습니다.

 

  금년 한 해도 여러 가지 어려움과 역경을 이러한 불굴의 의지와 투지로 꿋꿋이 헤쳐나갈 장애우들에게 따뜻한 격려와 존경의 박수를 보내면서 고 민요셉 신부님의 글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소개합니다. 가브리엘통신

 

 

                                 킬리만자로의 표범

                      <영화 '레인 맨‘ (Rain Man)을 중심으로>

 

가수 조용필 선생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

 

(대사)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나면 위대해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노래)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대사)

살아가는 일이 허전하고 등이 시릴 때

그것을 위안해 줄 아무것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세상을

그런 세상을 새삼스레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건 사랑 때문이라구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고독하게 만드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사랑만큼 고독해진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지

너는 귀뚜라미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귀뚜라미를 사랑한다

너는 라일락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라일락을 사랑한다.

너는 밤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밤을 사랑한다.

그리고 또 나는 사랑한다.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내 청춘에 건배

 

(노래)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

정열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나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않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

 

(대사)

아무리 깊은 밤일지라도 한 가닥 불빛으로 나는 남으리

메마르고 타 버린 땅일지라도 한줄기 맑은 물소리로 나는 남으리

거센 폭풍우 초목을 휩쓸어도 꺽이지 않는 한그루 나무되리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

 

(노래)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베낭을 메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라라--라 라라 라 라--라 라-----

 

  강한 자에게 아양을 떨고, 약한 자를 짓밟는 세상의 생리가 주로 썩은 고기만 뜯어 먹는다는 하이에나의 습성을 닮았다고들 합니다. 육적인 생활에 길들여져 살아가는 오늘날의 현대인의 모습에 어린 왕자와도 같은 고독하면서도 신선한 충격을 주는 사람이 그리운 시절을 저희는 살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에 저는 명동의 한 소극장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바로 「레인 맨」(Rain Man)입니다. 저는 형제간의 우애를 다룬 작품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도생활을 하는 저에게 참으로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학사상을 통해서 기고된 김성곤 선생의 '「레인 맨」에 관한 영화에세이'를 접하면서 전혀 다른 각도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선생의 관점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의 글을 숙독한 후 다시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를 종교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해 보았습니다. 영화 「레인 맨」의 줄거리는 <김성곤, '김성곤'교수의 영화에세이(Essays on Film), 열음사, 1994, 17-27쪽>에 있는 글을 제 나름대로 재편집하였습니다 :

 

  영화 「레인 맨」, 이 영화는 한 인간의 깨달음과 눈뜸의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주인공은 바로 동생(톰 크루즈 분)입니다. 형(더스틴 호프만 분)은 동생의 눈을 뜨게 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어렸을 때였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타지 못하게 하였던 아버지의 자동차를 타고 나갑니다. 아버지는 경찰에 신고하였고, 신고를 받은 경찰에 의해 주인공은 체포됩니다. 결국 그 사건으로 인하여 그는 집을 뛰쳐나가 버립니다. 그리고는 동부를 떠나 서부로 갑니다. 그의 첫 번째 서부 여행입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자동차 판매인인 그의 인생은 온통 돈과 기계(전화와 자동차)에 매달려 돈과 기계의 노예과 되어 나날을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동차(기계)를 타고 가다가, 카폰(기계)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통고받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몫으로 돌아오게 될 아버지의 유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모든 재산을 어느 요양원에 기증해 버렸고 그에게 단 한 푼의 돈도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물려 준 것이라고는 그가 어릴 때 결국 집을 떠나가게 되었던 그 자동차와 장미정원 두 가지뿐입니다. 그는 물려받은 자동차로 문제의 요양원을 찾아갑니다. 거기서 그는 우연히 어느 자폐증 환자를 만납니다. 그 환자는 자신의 감추어진 형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유산을 돌려받을 욕심으로 형을 납치합니다. 아버지의 유산인 그 자동차로 그는 형을 태우고 목적지인 캘리포니아로 즉 두 번째의 서부 여행을 떠납니다.

   여기서 공간적인 동부와 서부는 시간적으로 보면 과거와 현재입니다. 즉 주인공은 살고 있는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갔다가 형을 데리고 다시 현재로 되돌아옵니다.

  결국 두 번째의 서부여행 즉 과거를 출발해 현재로 되돌아오는 여행을 통해 주인공은 첫 번째의 서부여행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어렸을 때 왜 아버지는 자동차를 타지 못하게 하였는가? 왜 지금은 자동차와 장미정원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는가? 자폐증 환자인 형은 또 왜 만나게 되었는가?

   그는 자폐증 환자인 형을 처음에는 짜증스럽게 느끼기만 했으나 여행을 통해 형을 좋아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오직 기계적이고 경제적인 인간관계밖에 몰랐었는데 이제는 다른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며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어렸을 때, '레인 맨' 이 자장가를 불러 준 것을 기억하는데, 그것은 사실 레이먼드라는 형의 이름을 혼동한 것임을 알 게 됩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황폐한 가슴에 다시한번 '생명의 비를 가져다 줄 존재'가 ‘레인 맨’(Rain Man)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레인 맨’은 기계로 상징되는 물질적 성공만을 추구하느라 너무나 오랫동안 요양원에 유폐시켜 온, 그래서 이제는 그 존재마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목가적 꿈과 녹색의 정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레인 맨’은 이제 자폐증 환자가 되었고, 밀폐된 곳에서 TV프로그램에 중독된 채 살아가고 있는 레이먼드가 되었습니다. 그가 꼭 봐야 된다고 주장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가 '위험'을 의미하는 퀴즈게임 '제퍼디'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퀴즈게임의 답을 다 알고 있습니다. 즉 과연 기계문명과 물질주의의 추구는 지금 '위험'에 처해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레인 맨’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인 맨’마저도 지금은 요양원에 감금된 채 '위험'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요양원을 벗어난 ‘레인 맨’은 아우인 주인공의 가슴에 촉촉한 단비를 내려줍니다.

   아버지는 누구이며 주인공인 아우는 누구인가? 또한 형인 ‘레인 맨’은 누구인가? 그리고 요양원은 무엇을 상징하고 왜 아버지는 요양원에 자신의 전재산을 기증하였는가?

   캘리포니아에 도착하기 직전에 이들은 라스베가스에 들릅니다. 라스베가스는 물질주의와 상업주의 그리고 기계주의와 한탕주의가 극치를 이루는 정점입니다. 라스베가스는 인간과 기계 또는 진짜 녹색과 가짜 녹색의 대결의 장입니다. 즉 정원(초원)과 돈(물질)과의 대결입니다. 형과 아우, 두 형제는 온갖 정교한 기계들과 상업주의와 물질주의 앞에 과감히 도전합니다. 그들의 도전은 둘 중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로지 두 형제가 마음을 합했을 때만 가능합니다. 라스베가스의 유혹은 피해 가거나 이겨내야만 하는 시간이요 공간입니다.

   ‘레인 맨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뜨거운 물건입니다. 그는 뜨거운 물 때문에 요양원으로 쫒겨났고, 또 나중에는 과열된 토스터 기계에서 난 불로 인해 소동을 피웁니다. 이는 뜨거운 불을 꺼서 우리의 화상을 막아 줄 수 있는 시원한 비를 상실한 현대의 '레인 맨'의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녹색의 초원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대자연의 '비'입니다.

   결국 아버지는 방탕한 아들의 문제를 자신의 위대한 유산으로 깨끗이 해결해 줍니다. 아버지가 방탕한 아들에게 남겨진 유산이 바로 '레인 맨'인 형이라는 것을 그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이제 주인공인 아우는 맹목적인 물질적 성공의 추구 대신 한때 잃어 버렸던 녹색의 꿈을 다시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레인 맨’은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아우가 형을 자기 옆에 두고 싶어 하였지만 …. 그러나 주인공은 결코 형인 ‘레인 맨’을 영원히 영원토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영화 「레인 맨」의 상징적인 의미의 줄거리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에게 계시된 말씀을 곧이곧대로 알아들었습니다. 일종의 착오(mistake)입니다. 그렇게 그는 외적인 건물, 허물어진 낡은 건물을 수리해야 했습니다. 그냥 수리해 나갔습니다. 결국 그는 교회의 건물을 수리해 나가면서 차츰차츰 하느님 성령의 바람을, 계시의 참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르침(direction)의 의미를 깨달은 것입니다. 결국 그에게 주어진 사명인 교회를 살려야 한다, 세상을 살려야 한다는 하느님 성령의 계시를 올바로 알아듣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복음에 따른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저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오늘을 사는 저희의 모습, 저희의 꼬라지와 너무도 맞아 떨어지기에 고민을 해야 할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일까? 저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는 다른 사람들, 다른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제 안에서, 저희들 안에서, 저희 공동체 안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새로운 바람을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모양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적으로도 저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외적인 모양새가 변했는데 내적인 모양이 변하지 않는다면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저희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저희 공동체는 내적으로 영적으로 조금씩 변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실행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저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시고 계십니다.

   이제 저희는 저희가 잃어버린 것,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돌이켜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동안 저희가 요양원에 유폐시켜 온 '레인 맨'을 찾아내어 고갈되고 황폐해진 저희 마음의 황무지에 다시한번 생명의 비가 내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저희는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에로 조금씩조금씩 탈바꿈해 나가고 있습니다. ‘레인 맨’에서 주인공인 아우가 자폐증인 형을 만나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 태어나듯이 우리도 새롭게 거듭 태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구약의 소예언자 하깨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 "너희는 어찌하여 성전이 무너졌는데도 아랑곳없이 벽을 널빤지로 꾸민 집에서 사느냐?" (하깨 1, 4). 또한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사건을 연상하면서 '성사란 무엇인가?' 에 관한 물음을 던지게 되고 그 답으로서 십자가상 한가운데 매달려 계시는 그리스도를 묵상, 관상하게 됩니다. 결국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아담과 하와가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되는 광야를 지나 새 하늘과 새 땅인 새 예루살렘 도성으로 들어가는 역사를 이 영화에서 바라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전 재산을 요양원에 기증하였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탕자인 작은 아들에게 추구해야 할 참된 보물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고자 하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저 버리고 하늘나라를 상실한 저희에게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저희가 찾고 있는 '레인 맨'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상에서 하신 예수님의 일곱 가지 말씀(가상7언)은 바로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는 생명의 빗줄기입니다.

 

  *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루가 23, 34).

  *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루가 23, 34).

  *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 26-27).

  *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 27, 46 ; 마르 15, 34).

 * 목마르다 (요한 19, 28).

 * 이제 다 이루었다 (요한 19, 30).

  *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루가 23, 46).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생명의 소리이며, 창으로 찔린 예수님의 오른 쪽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피와 물'입니다. 그렇게 흘러나오는 그리스도의 피와 물을 하느님의 천사들이 성작으로 받쳐들고 받고 있습니다. 보이는지요?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저희를 통하여 허물어져 가는 교회, 오랜 가뭄으로 메말라 있는 세상에 한줄기 시원한 빗물로 만물을, 대지를 촉촉히 적시는 레인 맨을 선물로 주십니다. 레인 맨은 니체의 입으로 고백한 ‘죽어 버린 신’이 아닌, ‘춤추는 신으로서의 하느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상에서의 그 고통,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고통에 못이겨서 몸을 부르르 떠는 그 몸짓을 춤을 춘다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레인 맨‘은 인간의 고통을 함께하시는 「춤추는 하느님」입니다. 그렇습니다. 레인 맨은 십자가상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가수입니다. 조용필 선생이 노래한 고독한 킬리만자로의 표범입니다. 킬리만자로의 그 높은 산정 즉 드높이 세워진 십자가를 무대로 하여 일곱 가지 고독을 노래하는 고독한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면서 수도자입니다. 레인 맨인 그리스도처럼,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처럼 우리도 레인 맨이 되어야 하고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 민요셉 신부님의 ‘하늘로부터 키재기’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