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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성당의 살인 (로메로)
   2018/12/28  10:32
 로메로.jpg
주: 내일 즉 12월 29일은 영국의 성 토마스 베켓 주교 순교기념일입니다. 지난 10월에 시성된 오스카 로메로 주교님이 갑자기 생각이 나서 수년 전에 쓴 글과 영화 '로메로'를 소개합니다.

                                   대성당의 살인

   십자가를 안테나로!
   1162년 영국 국왕 헨리 2세는 공석이 된 켄터베리 대주교에 자신과 절친한 우정을 맺고 있던 토마스 베켓을 추천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것은 그를 대주교로 앉힘으로써 교회로부터 오는 여러 가지 제재를 토마스가 막아줄 것을 기대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토마스는 이를 알고 강력히 주교수품을 거부하였으나 결국 왕의 뜻대로 켄터베리 대주교로 착좌되었습니다. 그러나 베켓은 교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왕과의 우정을 떠나서 교회를 대변하는 인물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베켓이 주교가 되면서 교회를 대변하여 용감히 발언하고 교회의 권위를 왕권으로부터 보호, 방어해나가자 왕과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우정을 믿고 또 이를 이용하려던 헨리 2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왕은 토마스를 제거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1170년 12월 29일 국왕은 4명의 자객을 보내어 대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대주교를 무참히 살해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토마스의 죽음이 알려지자 이를 규탄하는 분노의 물결이 영국을 넘어 유럽 전체로 불길처럼 번져나갔습니다. 그리고 토마스를 추모하는 순례객이 줄을 잇기 시작하더니 토마스의 전구로 일어난 기적이 불과 몇 년 사이에 무려 700건이 넘었습니다. 드디어 교황 알렉산더 3세는 토마스를 시성하기에 이르렀고 헨리 2세는 자신에게 씌어진 불명예를 만회하기 위해 토마스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참회한다는 명분으로 친구의 무덤이 있는 대성당을 찾았습니다. 국왕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볼기짝을 내어놓았습니다. 당시 켄터베리 대성당에 살고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77명이었는데 왕은 그 수도승 한사람한사람마다 자신의 볼기짝을 때리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왕이 77명의 수도승에게 볼기짝을 맞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철썩, 철썩... 그 소리가 아직도 들립니다. 더 이상 볼기짝을 맞는 국왕이 없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C. Harper의 st. Thomas Becket 참조)

   오늘 복음(루가 2, 22-35)에서 시므온은 성전에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러온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라고 예언을 합니다. 그 예언은 결국 이루어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미사 중에 저격되어 돌아가신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님을 보더라도 말입니다. 토마스 베켓주교님도 자신이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곧 돌아가실 것을 미리 아시고 살해되기 며칠 전인 성탄절 아침에 다음과 같은 뜻깊은 강론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루가 2, 1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의 자녀이신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성탄대축일입니다...하늘의 수많은 천사들이 베틀레헴의 목동들 앞에 나타나,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라고 말씀하신 그 시각이 바로 어저께 밤이었으며 우리가 주님의 탄생을 찬양하고 십자가에서 수산하심과 돌아가심을 같이 찬양하는 것도 일년 가운데 바로 이때입니다. 사실 탄생과 죽음을 함께 찬양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알아듣기 어려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같은 이유 때문에 기뻐할 수도 있고 동시에 슬퍼할 수 있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교 성사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자, 이제 잠시 ‘평화’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세상이 끊임없이 전쟁과 전쟁의 공포로 위협받고 있는 이때 , 천사들은 평화를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으신지요? 천사들의 이야기는 잘못된 것이고 주님께서 하신 약속은 기만이며 실망만 안겨주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까?

   자, 이제 우리 주님께서 평화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주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주신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예수 성탄 대축일에 우리는 주님의 탄생하심과 함께 주님의 죽으심을 함께 찬양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 날인 내일, 우리는 당신의 첫 순교자인 성 스테파노의 순교를 찬양합니다. 첫 순교자의 순교일이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바로 다음날이라는 것이 단지 우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탄생하심과 수난하심을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처럼 주님이 아닌 순교자들의 죽음도 기뻐하고 동시에 슬퍼합니다. 왜 우리는 슬퍼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를 슬퍼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순교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을 순교로 이끈 세상의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기뻐하게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영혼이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늘의 성인들 품위에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순교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가 그리스도교인이며,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단지 한 착한 그리스도교인이라고 생각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저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단순하게 성인의 대열에 오른 한 선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순교자를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지 기뻐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슬픔이나 기쁨은 세상이 말하는 슬픔이나 기쁨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순교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인들이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의 순교란,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계획에 의해 인간의 통치자가 되듯이 성인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뜻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는 더더욱 아닙니다. 순교란 언제나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훈계하고 그들을 인도하며 그들을 하느님의 길로 돌아오게 하는 하느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인간의 의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된 순교자란 하느님의 의지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심지어 순교자가 되는 영광조차도 바라지 않는 하느님의 도구가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교회는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늘에서는 성인들이 자기 스스로를 가장 낮은 자리로 자리낮춤하지만 그들은 가장 고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순교자들은 우리의 시각으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존재하는 것을 존재케 하시는 거룩한 빛 안에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 친애하는 하느님의 자녀이신 형제자매 여러분께 지난 시절의 순교자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순교하신 성 엘페지 켄터베리 대주교님을 기억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오늘, 엘페지 대주교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신 그 평화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이 올바르고 적절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앞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다시 강론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머지않아 또 다른 순교자가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마지막 순교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가슴 속에 제가 드린 이 말씀이 깊이깊이 간직될 수 있기를 바라며 앞으로 언젠가 그 말씀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T.S. Eliot 의 ‘대성당의 살인’중에서 발췌)

                                  <영화 '로메로'>

   1977년 엘 살바도르(El Salvador)의 대통령 선거 전야. 정치에 관심 없는 학구파 오스카 로메로 신부(Archbishop Oscar Romero: 라울 줄리아 분)는 엠베르토 장군(General Humberto: 해롤드 캐논 분)이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선거에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외치며, 반대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예상밖으로 주교로 임명된 로메로는 성당내의 동료들로부터 무능력한 주교가 될 것이라는 일부 신부들로부터 눈총을 받는 가운데 독재자인 엠베르토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주교로 취임되던 날 자유를 외치던 군중들이 무차별 총격에 의해 사살당한다.

   어느날 시골길을 달리던 그란테 신부(Father Rutilio Grande: 리차드 조단 분)가 저격을 당하고, 그란테 신부의 성당에 간 로메로 주교는 성당을 검거하고 있던 군인들에 의해 수모와 생명의 위협을 당하지만 미사를 거행하게 된다. 주민을 살상한 군인들에 대치하여 오수나 신부(Father Alfonzo Osuna: 아레얀드로 브라초 분)와 주민들이 성당내에서 대치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무기를 버리고 나오면 용서해 줄 것을 약속받은 로메로 신부는 그들을 설득하여 성당을 나오게 하지만 오수나 신부와 함께 로메로 주교 마져도 군인들에 의해 잡혀가 고문과 수모를 당한다.

   자유를 염원하는 민중의 염원에 반하여 점점 탄압을 강화해오는 군사 정권은 마침내 로메로 주교를 암살할 것을 지령한다. 주교 회의에서 로메로 주교가 로마로 돌아가던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주교가 대신할 것을 토론하지만 로메로 주교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신하는 고난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로메로 주교가 성찬식을 거행하는 성당에 사복으로 위장한 군인이 들어와 그를 무참하게 저격을 한다...

                         <말씀에 접지하기; 로마 8, 35>

(마르코니 문화영성 연구소 : http://www.daegu-archdiocese.or.kr/page/catholic_life.html?srl=cross§ions=goo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