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그룹웨어
Home > 가톨릭생활 > 칼럼 > 주일 복음 산책
제목 사랑을 위해서라면 고통 아니면 죽음을 주소서(주님의 고난 성지 주일)
   2012/03/30  17:21
 박영식신부님강론9(4월1일).hwp

사랑을 위해서라면 고통 아니면 죽음을 주소서

(주님의 고난 성지 주일)

 

마르코 복음 15,1-39

 

예수님 시대 사형 집행인들은 사형수에게 뼛조각이나 쇠붙이나 못이 달린 가죽 끈으로 채찍질을 한 뒤 발가벗기고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들은 그의 머리를 아래로 숙이게 하고 그의 생식기를 찌르기도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군인들이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갈대에 감아 예수님의 입까지 갖다 대야 할 만큼 꽤 높았던 것 같다. 형 집행인들이 높은 위치를 형장으로 택한 것은 모든 사람이 형 집행을 보고 겁을 먹게 하기 위함이었다. 십자가에 달린 시체는 새들의 먹이가 되고 개들이 게걸스럽게 뜯어먹곤 했다. 의학적으로 손바닥에 박힌 못은 몸무게 때문에 찢겨 나오고 만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에 못이 박혔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또 십자가에 못 박힌 사형수의 양팔이 높이 올라가 있기 때문에 호흡하기가 고통스럽다. 형 집행인들은 사형수의 고통을 연장하기 위해 몸을 떠받쳐 호흡할 수 있게 하기도 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일찍 돌아가셨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을 떠받치지 않은 것 같다. 십자가 죽음은 의학적으로 과다출혈과 탈수현상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예수님은 강도들과 함께 처형되는 극도의 치욕을 당하셨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애절하게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저버리셨나이까?”(마르 15,34) 하고 부르짖으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으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잔인한 형벌인 십자가형을 어떤 자세로 받으셨는가?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전 인류를 구원하려고 스스로 십자가형을 받으셨다고 기록했다. 예수님은 제자 하나가 당신을 체포하러 온 대사제의 종의 귀를 칼로 자르자 그를 고쳐주셨다(루카 22,50-51). 또한 예수님은 빌라도가 당신을 헤로데에게 신문을 받게 함으로써 앙숙이었던 이 둘을 화해시키셨다(23,12).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며 평소에 가르치신 대로 원수들을 용서하고(23,34),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강도를 회개시키며 그에게 낙원을 약속하셨다(23,41-43). 재판을 받으시는 예수님은 폭력 앞에 철저하게 무력한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재판을 주도하고 계셨다.

 

그분은 당신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빌라도 앞에서도 비굴하게 자비를 간청하기는커녕 묵비권을 행사하실 정도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류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마태 27,14).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덜어주는 식초를 마시기를 거절하심으로써 겟세마니에서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하신 결심을 철두철미하게 지키셨다(27,34).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잔인한 십자가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존재이유를 실현하셨다. 이처럼 초기 천주교 신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참혹하게 온갖 고통에 짓이겨진 가련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바쳐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주님으로 받들어 모셨다. 그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더욱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예수님처럼 목숨을 바쳐 이웃을 사랑하려는 열정을 받았다.

 

멜 깁슨은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영화에서 어떤 인간도 견뎌낼 수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잔인하고 무자비한 고문에 짓이겨지신 예수를 묘사했다. 이런 영화는 관객들에게 너무나 참혹한 예수의 모습을 그린 이 영화는 연민의 정은커녕 극도의 폭력을 보고서 대리만족의 쾌감을 느끼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부작용을 낸다. 관객들 자신도 폭력을 휘두르려는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실제로 그 영화가 나온 뒤 폭력 범죄가 훨씬 더 많아졌다는 통계가 나왔다. 위 영화에 나오는 신심은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졸작 중 졸작이다. 또한 어떤 비디오에서는 군인이 예수님의 손에 못을 박는 장면과 그 옆에서 대성통곡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관객들은 이것을 보고서 두 분의 고통보다 자신의 눈물겨운 삶을 생각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신세타령을 하게 된다.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 그 장면의 뜻이 눈물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우리는 십자가를 우러러 보며 우리의 죄를 우리 대신에 속죄하여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느낀다. 우리도 세례를 받았을 때 이기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이웃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 무자비할 정도로 우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12331일 효목성당 박영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