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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이나 우정은 작은 씨앗을 큰 나무로 키우는 것(연중 제11주일)
   2012/06/15  16:23

사랑이나 우정은 작은 씨앗을 큰 나무로 키우는 것

(연중 제11주일)

마르코복음 4,30-32

 

예수님은 하느님의 왕국을 겨자씨에 비유하셨다. 이스라엘에는 여러 종류의 겨자나무가 있었다. 검정 색 겨자나무 씨의 크기는 0,95밀리미터 내지 1,6밀리미터이고 흰색 겨자나무 씨의 경우 그 갑절이다. 겨자씨가 모든 씨앗들 중에서 가장 작은 씨라는 것은 팔레스티나에 산 사람들에게는 상식이었다. 겨자 나무의 열매와 잎은 기름과 조미료로 사용되었다. 파종된 겨자씨는 발아해 올라와서 성장하여 모든 식물들 중에서 가장 크게 되고 큰 가지를 낸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일년 정도 성장한 겨자나무가 1미터 50센티미터에서 3미터 정도나 되기도 했다. 그래서 하늘의 새들이 겨자 나무 그늘 밑에 깃들일 수 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왕국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을 때는 이 왕국이 겨자씨처럼 작디작고 미약하게 보였다. 더구나 예수님은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되셨기 때문에 이 겨자씨가 완전히 없어진 것처럼 여겨졌다. 예수님의 구원활동은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초기 교회도 복음을 선포하며 이와 비슷한 체험을 했다. 하느님의 왕권에 속하는 신앙생활도 약하고 왜소하게 보이고 박해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교회가 하느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한 결과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작고 척박하고 가난한 땅, 로마제국의 식민지인 유다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의 입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한 하느님 왕국의 복음을 오늘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민족들이 믿고 따르고 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 밑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 32). ‘하늘의 새들은 모든 민족들을 가리키고, 겨자 나무의 큰 가지가 만든 그늘 밑에 깃들인다는 말은 그들이 지속적 보호를 찾았다는 것을 상징한다.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 왕국의 복음을 믿고 따라 구원과 영생을 누린다는 뜻이다.

 

결혼생활은 하느님께 다 자란 나무를 선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작은 씨앗을 하나 받아 평생을 두고 큰 나무로 키우는 것과 같다. 끊임없이 서로 적응하고 타협하려고 애쓰는 부부는 혼인성사 때 하느님께 받은 작은 씨앗을 큰 나무로 키워 많은 과일이 주렁주렁 달려 사람들이 과일을 따먹고 즐기게 해준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 불행한 사람들이나 원수를 사랑할 힘을 가진다. 이러한 가정에 흘러넘치는 사랑은 이웃에게 전해진다. 가장 훌륭한 이웃사랑은 이웃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깨닫고 영생의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왕권은 이런 부부의 삶 가운데 실현되어 하늘의 새들이 둥지를 트는 큰 나무가 된다. 이와 반대로, 혼인성사 때 하느님께 받은 작은 씨가 큰 나무로 성장했어도 과일이 하나도 달리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기적인 가정에서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에서도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어디서나 불평분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 친구나 가족 그리고 친지들의 결점에 익숙해져라. 도무지 피해갈 수 없는 관계에서 결점을 일일이 지적하고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추한 얼굴도 자주 보면 참을 만해지는 게 인간의 간사한 속성이다”(B. Gracian). 또한 자기 때문에 남의 행복이 희생되는 것을 부끄러워해도 자기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족 이기주의는 개인 이기주의보다 훨씬 참혹하다.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과 도움을 베풀어 집단이기주의에서 해방된 사람 가운데 하느님의 왕권이 실현된다.

 

우리 가정은 하느님께 받은 그 작은 사랑, 믿음, 희망의 씨앗을 얼마나 키우고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가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훌륭한 인격이 목적이다. 재산을 잃을 땐 손실이 없지만 건강을 잃을 땐 약간의 손실이 있다. 그러나 인격이나 명성을 잃을 땐 모든 것을 잃는다.

“10분만 하루를 돌아보고 잠자리에 드십시오. 오늘의 기쁨과 보람이 내일로 이어지며 오늘의 실수가 내일 되풀이 되지 않습니다.”

 

<12616-17일 효목, 박영식 야고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