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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패가망신한 순교자들이 세운 한국 천주교회(성김대건, 정하상, 순교자들)
   2012/09/22  12:16

 

패가망신한 사형수들이 세운 한국 천주교회

(성 김대건, 성 정하상, 동료 순교자들)

루카복음 9,23-26

선교사가 복음을 전해주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우리나라 경우에는 교회 역사상 유례가 없이 스스로 복음과 믿음을 찾아 왔다. 이 벽은 선교사가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천주교 조직을 만든 인물이었다. 이 벽은 키가 8척이고 한 손으로 무쇠 백 근을 드는 장사였다. 더구나 성호 이익에게 “장차 반드시 큰 그릇이 되리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머리도 총명했다. 이 벽은 고조부 이경상에게 천주교를 배웠다. 이경상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 임금이 청나라 장군에게 삼전도의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인질로 청나라 선양에 끌려간 소현세자를 모셨다. 소현세자는 9년간 선양에 머무르는 동안 1644년 9월에는 명나라를 정벌하는 청나라 군사를 따라 북경에 가 머무르면서 독일인 신부 J. 아담 샬에게 천주교와 서구 과학문명에 대한 여러 지식을 배워 천문학, 수학, 천주교 서적, 천주상(天主像) 등을 가지고 1645년 2월 18일 서울로 돌아왔으나, 두 달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했다(암살).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아담 샬에게 받은 천주교 서적 일부가 이 벽의 집안에 전해져 왔던 것이다. 이벽은 이런 서적들을 읽고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학 서적은 금서가 아니고 이벽 또한 천주교가 유교의 충효 개념과 배치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가 지은 ‘천주 찬미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집안에는 어른 있고 나라에는 임금 있네.

내 몸에는 영혼 있고 하늘에는 천주 있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겐 충성하네.

삼강오륜 지켜가자 천주공경 으뜸일세.

...

아비 없는 자식 봤나 양지 없는 음지 있나

임금용안 못 뵈었다 나라백성 아니런가

천당지옥 가보았나 세상사람 시비마소.

있는 천당 모른선비 천당없다 어이아노.”

이처럼 이미 천주교를 믿고 있던 이 벽(정 약현의 처남)은 이승훈 베드로에게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인 그의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천주교 서적을 구입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승훈은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돌아와서 성 정하상의 아버지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이 벽 세례자 요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승훈은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는 자기들끼리 신부를 만들 수 있다고 여기고 북경에서 본 대로 주교, 신부, 그 밑의 성직자들로 된 교계제도를 본받아 조직을 만들었다. 그는 자기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존창 곤자가의 루도비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최창현 요한을 신부로 선정하여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만들고, 이들은 전국 각지에 파견되어 선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세례성사, 고해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를 집전한 것 같다. 파리 외방 전교회 달레(Ch. Dallet) 신부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대죄는 체벌로 다스리고, 소죄의 경우에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 베풀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희생하기’ 등을 보속으로 주었다. 훗날 그들은 북경의 주교에게 문의하여 이러한 가성직제도가 불법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자발적으로 해체하고 사제를 모시기로 결의했다. 정약종은 최초 조선 천주교 회장으로 활동하며 선교사를 모시기 위해 애쓴 결과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을 첫 선교사제로 모시게 되었다.

천주교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정조대왕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듬해(1801년) 집권 노론이 정조대왕 때 성장한 남인을 제거하기 위해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정약종은 그 해 2월 서소문 밖 네거리(오늘 서소문 공원)에서 맏아들 철상 카롤로, 이승훈, 최필공, 최창현 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성 정하상은 아버지가 순교할 때 겨우 일곱 살로 어머니 성 유 세실리아와 누이동생 성 정혜 엘리사벳(5살)과 함께 풀려났다. 가산을 전부 몰수당해 먹을 음식과 집이 없었다. 성 정하상은 강진으로 유배간 삼촌 정약용의 집이 있는 마현(마재)으로 내려가 가난하게 살았다.

정약용은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요 정치가였다.

성 정하상의 큰 삼촌 정약전도 유배를 갔다.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 알렉시오는 정약종에게 교리를 배워 신자가 되고 주문모 신부님을 도운 열심한 신자였다. 그러다가 천주교 자유를 위해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쓴 것이 발각되어 능지처참되었다(죄인을 나무에 매달아놓고 속살이 보일 때까지 회칼로 살점을 조각조각 뜯어내는 형벌이고, 전문가는 4,700살점을 뜯어낼 수 있다고 함).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는 정약종에게 교리를 배우고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최인길의 집에서 세례를 받고 주문모 신부님을 도운 열심한 신자였다. 그러다가 26살 때 천주교 자유를 위해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쓴 것이 발각되어 능지처참되었다(죄인을 나무에 매달아놓고 속살이 보일 때까지 회칼로 살점을 조각조각 뜯어내는 형벌, 전문가는 4,700 살점을 뜯어낸다고 함). 황사영은 조선왕조 세조 때 공조판서를 지낸 장무공(莊武公) 형(衡) 이래 그의 증조부 준(晙)이 공조판서를 지내기까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창원 황 씨 명문대가의 후예요 남인에 속했다. 황사영이 서울 서부 아현방(오늘 서대문구 아현동)에서 태어나기 4년 전 아버지 황석범은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와 한림을 역임했으나 사영을 유복자로 남기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황사영의 어머니 평창 이씨 윤혜(李允惠)는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조선 천주교회를 창설한 주역인 이승훈 베드로와 일가요 승훈의 아저씨인 진사 이동운의 딸이었다. 여덟 살 때까지 증조할아버지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고 자란 황사영은 워낙 영특해서 열여섯 살 때인 정조 14년(1790) 9월 12일 진사시(進士試)에 1등으로 급제했고, 이때 정조 임금이 그의 손목을 어루만져 주면서(御撫) “네가 스무 살이 되거든 곧 과인을 만나러 오너라” 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사영은 임금에게 잡힌 손목을 평생토록 명주로 감싸고 다녔다고 한다. 1980년 그의 무덤에서 손목을 감싼 토시가 별견되었다. 임금이 손 한번 잡아주면(御撫) 쌍놈도 그 자리에서 양반이 되고 벼슬을 받았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명성을 얻은 사영은 다산 정약용의 큰형 약현의 맏딸 명련(丁明連, 마리아, ‘난주’로도 불림)과 혼인함으로써 마재의 정씨 가문과 관계를 맺게 됐다. 약현의 첫 부인은 조선 천주교회를 창설한 주역인 성 이 벽의 누나이다. 정씨 형제들의 누이가 이승훈과 혼인했으므로 이승훈은 황사영의 처고모부가 된다. 사영은 북경의 서양 선교사들이 쓴 한문 교리서를 처고모에게 얻어 읽고서는 과거공부를 포기한 채 천주교 진리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황사영은 처삼촌이기도 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명도회(明道會) 회장을 도와 열심히 선교활동을 펴나갔다. 이처럼 황사영은 부귀영화가 보장된 길을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택했던 것이다. 조선에서 천주교가

박해 때문에 꺼져가는 등불처럼 되어 가고 있는 동안 성 정하상은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여동생과 함께 예수님을 믿고 따랐다. 20살이 되자 어머니와 동생을 마재에 남겨두고 한양으로 올라와 목자 없는 조선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교회 재건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823년부터 조선 천주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성 정하상은 유진길, 조신철의 후원으로 끊임없이 사제를 모시려고 애썼다. 1816년 동지사(冬至使)를 따라 베이징에 가서 조선에 신부님을 보내달라고 간청했고, 그 뒤에도 아홉 차례나 베이징을 오가며, 또한 로마 교황님께도 신부님을 보내달라고 호소하였다. 성 정하상의 이러한 노력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26년 조선교회를 북경 교구에서 분리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산하에 새로이 조선 감목대리구를 설치하고 브뤼기에르 주교(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중국에서 병사함)를 초대 감목대리로 임명했다. 드디어 성 정하상은 1834년 유방제 신부님을, 1836년에는 모방 신부님을 비밀리에 자기 집에 모시게 되었다.

정하상은 모방 신부의 지시에 따라 김대건 성인을 사제로 만들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또한 성 정하상은 1837년 앵베르 주교를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모시게 되었다. 앵베르 주교는 1838년 성 정하상에게 속성 신학교육을 받고 사제로 만들려고 했으나 이듬해 기해박해 때 그가 순교함으로써 성사되지 못했다.

1834년 헌종이 8세에 즉위하자 순조의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하였으며, 왕대비를 적극 보필한 사람은 그 오빠 김유근(金儷根)이었다. 1836년부터 병으로 말조차 못하던 그는 1839년 성 유진길(劉進吉)의 권유를 받고 세례까지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 김 씨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유근의 은퇴로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변하였다. 이지연은 1839년 3월 입궐하여 천주교인을 역적으로 몰아 몰살시키려고 기해박해를 일으켰다. 1839년(헌종 5)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박해사건(己亥迫害)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시파(時派)인 안동 김 씨에게서 정권을 탈취하려는 벽파(僻派) 풍양 조 씨가 일으킨 것이다.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인은 43명이었다. 그 중 대부분이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나 성 남명혁 다미아노, 성 박희순 루치아(왕후의 상궁), 들 아홉 분은 믿음을 고수하여 순교했다. 5월 25일에는 대왕대비의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발표되자 천주교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성 정하상,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 조신철 카롤로 들, 중요한 분들이 체포되었다. 앵베르 주교는 신자들이 박해받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방 신부와 정 야고보(샤스탕) 신부에게 자수하라고 권고하고 자기도 자수했다. 1839년 6월 이광열 들 여덟 분, 8월에는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목이 잘려 군대 문 앞에 매달렸다. 성 정하상은 체포될 것을 염두에 두고 미리 써 두었던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체포되자 박해의 주동자인 우의정 이지연에게 올려 천주교 교리의 정당성을 알렸다. 이 글은 천주교의 진수를 밝히는 박력 있는 명문장이요 우리나라의 최초 효교론이다. 1881년 홍콩 교구에서 상재상서를 책으로 발간하고 중국에서도 전교를 위해 사용했다. 44세인 성 정하상은 아버지 정 약종이 순교한 곳인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어머니와 여동생, 성 유진길과 함께 참수당했다. 헌종실록에 따르면 이때 배교하여 석방된 신자가 48명, 옥사한 신자가 1명, 사형된 신자가 118명이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집안도 예수님 때문에 패가망신한 가정이다. 성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와 조부 택현 안드레아와 아버지 제준 이냐시오가 순교했다.

성 김대건과 성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들은 현세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자기 목숨을 바치고 가정이 완전히 파괴되는 고난을 겪음으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히 행복의 극치 속에서 살고 있다. 1925년 성 김대건과 성 정하상은 어머니와 누이동생 정혜와 함께 복자가 되고, 1984년 5월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우리나라에 와서 이분들을 모두 성인으로 선포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아 박해시대에 살지 않고 태평성세에 살고 있다. 날마다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순교자들을 본받아 목숨을 바치는 치열한 사랑의 불꽃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하겠다. 오늘 우리는 제발 예수님을 믿고 따라 자기와 이웃이 행복해지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라는 권유를 받고도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거나 신앙을 취미로 여기거나 교회를 친목단체로 간주하지 않는가? 헌금이 아깝고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고 성당에 가지 않고 헌금하는 액수만큼 성당에서 큰 소리를 치려고 하지는 않는가? 이렇게 살면 순교자들이 목숨을 다 바쳐 건설한 하느님의 구원공동체를 10년 이내로 파괴하거나 철저하게 약화시키고 말지 않을지 걱정이 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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