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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가 머무르다 간 자리에 남는 것?(사순 제5주일)
   2015/03/21  20:6

내가 머무르다 간 자리에 남는 것?(사순 제5주일)

 

요한복음 12,20-33

 

 

 

저마다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 법이다. 새가 나무 가지에 잠시 앉았다가 날아간 뒤에는 그 나뭇가지가 한동안 흔들린다. 연못에 돌을 던져도 파문이 일어난다. 봄이 지나간 자리에는 시든 꽃을 남기고, 가을이 지나간 자리에는 풍성한 열매를 남긴다. 부모는 자녀들을 남기고, 스승은 제자를 남긴다. 작곡가는 오선지에 아름다운 곡, 화가는 그림, 조각가는 조각 작품을 남긴다. 착한 사람은 훌륭한 일을 남기는 반면, 나쁜 사람은 불의한 일을 많이 남긴다. 철학가는 인생의 의미를 남긴다. 성인은 사랑과 자비를 남긴다. 세월이 지나간 자리에는 인생무상의 가르침이 남는다. 더구나 사람은 이 세상에 잠시 왔다가 사라져도 반드시 자취를 남겨 자기가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알리고 있다. 가정, 직장, 동네, 사회에서 과연 어떤 자취를 남겼고, 어떤 자취를 남기고 있으며, 어떤 자취를 남길 것인가? 내가 가지고 갈 것은 재산도 아니요 지위도 아니요 권력도 아니며 업적도 아니다. 나는 자식들에게만 재물을 남기고 갈 것이 아니다.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신나게 살다 가며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남기고 가야 하겠다.

 

무엇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다 갔음을 증명할까? 예술, 작품, , 업적, 지위?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다.”(알베르 카뮈)

우리가 이 지상에 살아 있었다는 증거는 누군가를 얼마나 진지하게, 헌신적으로 사랑했는가에 달려 있다. 사랑은 신체의 한 부분을 활용하여 얻어내는 예술, 작품, 업적, 지위 들과는 다르다. 사랑은 내가 몸과 마음을 다하고 목숨까지 바쳐 전인적이고 인격적인 관여로 이루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만이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받는 사람 양쪽에 삶의 의미를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삼심삼 년을 사시며 인류를 위해 당신 목숨을 바쳐 사랑의 십자가와 영원한 생명과 영복을 남기고 하느님 아버지께 올라가셨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생명은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발견이며, 죽음은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한 자연의 수법이다.”(괴테)

말라비틀어진 씨앗이 땅에 뒹굴고 있다. 사람들은 씨앗이 거기 있다가 부풀어 깨어져 없어지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보라, 그것은 생명을 받는다. 그것은 껍질을 부수고 잎을 내밀고 줄기도 성장한다. 그리고 봉오리가 맺히고 꽃이 피고 이삭이 달린다. 그것은 동일한 씨앗이다. 그러나 새로 맺힌 씨앗은 심겨졌을 때의 씨앗과 얼마나 다른가?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활할 때 우리의 껍질은 뒤에 남겨질 것이다. 몸은 몸의 본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부활한다. 그러나 그 몸의 모습은 얼마나 초월적인가? 하나는 지상의 영광을, 다른 하나는 하늘의 영광을 입는다.”(존 번연)

 

제 목숨에 집착하는 사람은 이기심을 충족하는 데 사로잡혀 이웃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결국 영생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파멸에 떨어지고 만다. 생명은 나와 너와 그의 만남 가운데서 싹이 트고 자라나며 꽃을 피우는 법이다. 생명은 어디든지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나뭇잎에게, 당신은 혼자서 살 수 있나요? 나뭇잎은 아니요. 나의 삶은 가지에 달려 있답니다.” 가지는 나의 생명은 뿌리에 달려 있어요.” 또 뿌리는 나는 잎과 가지와 둥지가 없으면 못산답니다.” 사람도 이러하다. 나를 웃게, 울게 하는 사람도 타인이다. 그 인연의 덕목은 서로 마음을 주는 데 있다. 사람이 서로 기대어 사는 것은 타자의 마음에 스며든다는 뜻이다. 내가 여기에 서 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도움이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자. 내 삶의 뿌리는 하느님과 이웃, 예컨대 어머니의 기도, 아버지의 충고, 친구와 친교 들이다. 남의 존재이유를 인정하는 것이 제 삶의 뿌리를 아는 것이다. 이처럼 내가 하느님의 창조와 이웃의 희생 덕분에 살고 있듯이, 나도 그분의 창조질서를 지키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도리다. 나아가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당신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을 닮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 영생과 영복을 누린다. 이러한 사랑의 희생 가운데 영생이 창조된다. 사랑이 생명을 창조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내가 머무르다 간 자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기쁨이 남아 있어야 한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누구나 목숨을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마르 8,35)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이 원하는 그 모습과 그 자리에 남아 있으면 영원한 것을 남기고 갈 수 있다. 돌아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하고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느라고 미쳐버리고 말더라도 그렇게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붓다도 그렇게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보리수 아래 남아 있었기 때문에 무아無我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그는 고작해야 보리수나무 밑에서 해탈한 한낱 하느님의 아들일 뿐이다.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이기심이라곤 전혀 없고 완전한 사랑을 베푸시는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바치신 하느님이다. 예수님은 죄를 모르시는 분이다. 이기심이 극미량밖에 없고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 수억만 명의 사랑을 다 모아도 한 분 예수님의 사랑과 비교할 가치가 되지 못한다. 예수님의 사랑만이 전 인류의 죗값을 대신 치러 지옥과 영원한 파멸에서 구할 수 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우리의 한 평생 삶의 자리로 굳게 지키려고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

내 존재를 지탱시키는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인간관계 속에서 끝까지 제 자리를 지키려면 밀알처럼 땅 속에 묻혀 썩어야 한다. 내가 아무개의 어머니, , 형수, 올케, 시누, 누이, 친구, 직장 동료, 스승, 제자, 이웃이라는 이 모든 인간관계에 충실한 사람이 덕을 닦은 대인이다. 사랑해야 하는 대상자가 많으면 사랑이 나누어져 작아질 것 같기도 하지만 신비스럽게 더욱더 커지기도 한다. 지하수를 퍼내면 계속 더 많은 물이 나오듯, 사랑은 계속 자라나고 커진다. 사랑은 심지어 혹독한 고난과 배신 속에서도 커진다. 순교자들은 살해당하면서 더욱더 큰 사랑을 가지고 기쁨의 극치 속에서 목숨을 하느님께 반납한 이들이다. 우리가 일생 이 지구에서 사는 목적은 더욱더 큰 사랑을 가지기 위함이다. 신앙생활, 가정과 직장과 공동체생활도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다.

나와 관계를 맺고 사는 하느님과 이웃을 한 분씩 기억하며 과연 내가 그들을 위해 밀알처럼 썩고 있는지 돌이켜보자.

 

사람은 사랑의 힘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자기에 대한 사랑은 죽음의 시작인 반면,

하느님과 만인에 대한 사랑은 생명의 시작이다.”(레오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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