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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9월 01일 화요일

[(녹)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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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는 것에 관한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하면서 해마다 9월 1일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지내기로 하였다. 이날 교회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의미를 묵상하고, 창조 질서를 파괴한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며, 생태계를 보호할 것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진다.
시편 86(85),3.5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시어 마귀를 몰아내신다(복음).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2,10ㄴ-16
형제 여러분, 10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11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12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13 우리는 이 선물에 관하여,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14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16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시편 145(144),8-9.10-11.12-13ㄱㄴ.13ㄷㄹ-14(◎ 17ㄱ)
◎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네.
○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
○ 주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
○ 당신의 위업과 그 나라의 존귀한 영광, 사람들에게 알리나이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무궁한 나라, 당신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 미치나이다. ◎
○ 주님은 말씀마다 참되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넘어지는 누구라도 주님은 붙드시고, 꺾인 이는 누구라도 일으켜 세우시네. ◎
루카 7,16
◎ 알렐루야.
○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 알렐루야.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님, 저희가 드리는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이 제사로 거행하는 구원의 신비가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시편 31(30),20 참조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성사의 힘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다고 합니다. 더러운 영을 내쫓으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그분의 권위를 언급합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연거푸 두 번 나타나는 예수님의 권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만 예수님과는 거리를 두지요. ‘무슨 상관’이냐며 예수님을 멀리합니다. 더러운 영은 제 이익과 제 삶의 안위를 행여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더러운 영은 자신의 삶이 다른 이와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제 삶의 자리라고 우기는 것이 더러운 영입니다. 타인의 자리를 맴돌다 그것이 제 것인 양 여기며 기생하는 삶이 더러운 영의 삶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제대로 안다고 하여도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방해꾼일 뿐이며 낯설고 불편한, 그야말로 ‘타인’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과 더러운 영을 구별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아픈 이를 아픈 이로 보고, 슬픈 이를 슬픈 이로 보며 순수한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데 예수님의 권위가 있습니다. 제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여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에 질서와 고유성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사유하고 존중하며 기념하는 오늘,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움켜쥐기보다, 우리 각자의 눈에 틀어박힌 들보를 빼내고 제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 우리의 눈이 자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의 모습을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 할 것은 ‘예.’라고만 할 수 있는 순수함과 순박함이 예수님의 참된 권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