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21년 전교 주일 담화 |
2021/10/23 16:43 |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1년 전교 주일 담화
(2021년 10월 24일)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힘을 체험하고, 우리 개인의 삶과 공동체 삶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현존을 깨달으면,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선포하고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그리고 인류와 맺으신 관계가 예수님의 강생의 신비, 복음,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드러났듯이, 이 관계는 하느님께서 온 인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그리고 우리의 기쁨과 고통, 희망과 고뇌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사목 헌장 22항 참조).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그리고 세상 구원의 필요성을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우리가 다음과 같은 사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요청합니다.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 22,9). 그 누구도 배척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이 자비로운 사랑에서 소외되거나 배척된다고 느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의 체험
복음화의 역사는, 주님께서 모든 이를 불러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대로 만나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자 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바람으로 시작되었습니다(요한 15,12-17 참조).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가장 먼저 전한 사람들은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은 주님을 처음 만날 날과 시간까지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9). 주님과 나누는 우정 안에서 사도들은, 주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시고,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굶주린 이들을 먹이시고,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시며, 더러운 이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가난한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하며, 참행복을 알려 주시고, 새로운 방식으로 권위 있게 가르쳐 주시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이는 그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기며 경이로움과 커다란 기쁨과 깊은 감사의 마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러한 체험에 관하여 우리의 마음 안에서 주님의 역동적 현존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 덕분에 우리는 희생과 오해가 따를지라도 사명에 힘쓰게 됩니다(예레 20,7-9 참조). 사랑은 언제나 멈추지 않고 활동하며,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는 희망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메시지를 나누도록 우리를 격려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고 듣고 체험해 왔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미래를 시작하셨고, 우리가 흔히 잊고 있는 인간의 본질적 특징, 곧 “우리는 사랑 안에서만 달성되는 충만함을 위하여 빚어졌다.”(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68항)는 점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이 미래는 새로운 계획들을 북돋을 수 있도록 하고, 우리 자신의 약함과 다른 이들의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를 증진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도록 하는 신앙을 일깨워 줍니다(「모든 형제들」, 67항 참조). 교회 공동체는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1요한 4,19 참조)는 사실을 감사한 마음으로 떠올릴 때마다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각별한 사랑에 우리는 경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탄은 본디 우리가 소유하거나 강요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이러한 방식으로만 무상성의 기적, 보답을 바라지 않고 우리 자신을 내어 주는 기적이 꽃필 수 있습니다. 선교 열정도 이성적 추론이나 이해타산의 결과로는 결코 얻어질 수 없습니다. ‘선교에 몸담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의 반영입니다”(교황청 전교기구에 보내는 메시지, 2020.5.21.).
그렇다 해도 모든 일이 언제나 쉬웠던 것은 아닙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적대와 고난 속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소외되고 감옥에 갇히는 경험에는,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반박하거나 심지어 부인하는 듯한 내적 외적 어려움들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이나 난관은 그들을 한 걸음 물러서게 하거나 자신 안에 갇히게 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와 갈등과 어려움을 선교를 위한 기회로 삼도록 했습니다. 한계나 장애는 주님의 성령으로 모든 것과 모든 이를 도유하는 특별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해방의 메시지에서 배척당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생생한 증거를 사도행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선교하는 제자들이 늘 가까이했던 책입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는 복음이 선포될 때 그 향기가 어떻게 퍼져나갔는지 이해하면서, 오직 성령께서 주실 수 있는 기쁨에 눈뜨게 됩니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께 꼭 매달려 고난을 이겨내면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활동하실 수 있다는 확신”과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이들은 모두 좋은 열매를 맺게 되리라는 것”(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79항)에 대한 확신을 키우도록 가르쳐 줍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시대도 수월하지 않습니다.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은, 이미 많은 이들이 체험한 고통, 고독, 가난, 불의를 부각시키고 증폭시켰습니다. 또한, 안전 불감증과, 우리 가운데 조용히 퍼져나가고 있는 분열과 양극화의 민낯을 드러냈습니다. 가장 약하고 힘없는 이들은 이를 더욱 심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좌절과 환멸과 극심한 피로를 느끼게 되었고, 희망을 짓누르는 부정적인 마음이 점점 커져 이를 이겨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2코린 4,5). 이로써 우리 공동체와 가정 안에서 우리는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힘찬 생명의 메시지를 듣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6) 이 희망의 메시지는 모든 형태의 결정론을 깨부숩니다. 그리고 이 희망의 메시지에 감동받은 이들이 일어나 우리 곁에 계시는 하느님의 ‘성사적’ 자비를 보여 줄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방법을 창의적으로 찾는 데에 필요한 자유와 담대함을 그들에게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도 길가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모든 이의 곁에 계십니다.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의 시기에, 보건을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명목으로 무관심과 냉담을 포장하고 정당화하려는 유혹이 생길 때, 필수적인 거리 두기 조치를 만남과 돌봄과 증진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자비의 사명이 긴급히 요청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고 들은 것”(사도 4,20), 곧 우리가 체험한 자비는 이렇게 판단의 기준이자 신뢰의 원천이 될 수 있고, “우리의 시간과 노력과 재화를 쏟아야 할 소속감과 연대의 공동체”(「모든 형제들」, 36항)를 세우고자 하는 공동의 열정을 회복할 수 있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모든 것이 그대로다.”라며 최악의 회의주의로 빠져들게 하는 구실에서 날마다 우리를 건져 내고 구원합니다. 그 어떤 대단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데도 자신의 안전과 안위와 기쁨을 포기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언제나 한결같이 응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물리치셨고 전능하신 분이심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살아 계십니다”(「복음의 기쁨」, 275항).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기를, 형제애를 지니기를,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를 소중히 여기고 나눌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는 주님께 도유받은 희망의 선교사들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희망의 선교사들은 그 누구도 혼자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예언적으로 일깨우는 이들입니다.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도 완전한 확신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우리가 주님께 받은 모든 것은 선하게 사용하고 다른 이들과 거저 나누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힘을 사도들이 보고 듣고 만져본 것처럼(1요한 1,1-4 참조), 우리는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신다는 확실한 깨달음으로 우리의 운명인 희망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와 나눌 용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주님을 우리만을 위한 주님으로 둘 수 없습니다. 교회의 복음화 사명은 우리 세상의 변화와 피조물의 돌봄 안에서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저마다 받은 초대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라는 올해 전교 주일의 주제는 우리 마음에 지닌 것을 우리가 저마다 ‘책임’지고 다른 이들에게 전하도록 하는 요청입니다. 이 사명은 언제나 교회의 특징이며, “교회는 복음화를 위하여 존재”(교황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14항)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립되거나 작은 무리로 나뉘어 있을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나약해지고 그 예언적 힘 그리고 그 경이와 감사를 깨닫는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본질적으로 신앙생활은 어느 곳에 있든지 모든 이를 포용하는 열린 마음을 더욱더 요청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엘리트 집단이 되려는 유혹에 굴복하기는커녕 오히려 주님께 감도되고 그분께서 주시는 새로운 삶, 곧 다른 민족들 가운데로 나아가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인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증언하는 삶에 이끌렸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노력과 희생의 열매를 다른 이들이 맛보리라는 것을 알고 씨뿌리는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인 너그러움과 감사와 숭고함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장 힘없고 병약하고 상처받은 이들도 그들 나름대로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제약이 있더라도 선은 언제나 함께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Christus Vivit], 239항).
해마다 10월 마지막 주일의 앞 주일에 거행하는 전교 주일에, 우리는 너그럽고 기쁨 넘치는 복음의 사도가 되겠다는 세례 때의 약속을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으로 증언하며 도와주는 모든 이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자신의 집과 가족들을 떠나 구원의 메시지에 목말랐던 지역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결연히 나서는 모든 이를 기억합시다.
그들의 선교 증언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용기를 내어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루카 10,2) 청하도록 격려받습니다. 우리는 선교의 소명이 과거의 일이거나 이전 시대의 낭만적인 흔적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자비의 전령이자 일꾼으로서 세상의 변방까지 나아가도록 촉구하는 참사랑의 이야기인 자신의 소명을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을 필요로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요청을 모든 이에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십니다. 우리는 도시나 가정의 한가운데에 있는 우리 주위의 모든 변방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보편적 개방성은 지리적 차원이 아니라 실존적 차원을 지닙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특히 요즈음과 같은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의 시대에 우리 삶의 반경을 넓히고, 우리의 “관심권”(「모든 형제들」, 97항)에 직접적으로 속하지 않는 다른 이들이 비록 우리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다가가는 능력을 날마다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명에 임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우리도 기꺼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곧 주님과 함께 우리 주변에 있는 이들도 우리의 형제자매라고 기꺼이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우리가 모두 참된 선교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선교하는 제자이신 성모님께서 세례 받은 모든 이 안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는 열망을 키워 주시기를 청합니다(마태 5,13-14 참조).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프란치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