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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담화] 2018년 제2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교황 담화
   2018/07/31  15:12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2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2018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일)

 

여기 가련한 이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들으셨다

 

1. “여기 가련한 이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들으셨다”(시편 34[33],7). 시편 저자의 이 말씀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통과 소외의 다양한 상황들 안에서 살아가는 많은 형제자매들, 곧 우리가 대개 습관처럼 ‘가난한 이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만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그는 빈곤을 직접 경험하였지만 그것을 주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의 노래로 바꾸었습니다. 이 시편은 매우 다양한 형태의 빈곤에 시달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참으로 가난한 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 주는 기회가 됩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의 필요를 이해하려면 그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 슬픔과 외로움과 배척으로 부서진 마음을 안고 당신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이들과 함께하시는 좋은 분이십니다. 자신의 존엄이 짓밟혔지만 빛과 위로를 얻고자 힘을 내어 주님을 바라보는 이들의 부르짖음에 주님께서는 귀를 기울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거짓 정의의 미명 아래 박해받고, 그러한 미명을 붙일 가치도 없는 정책으로 억압당하고 폭력으로 위협받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들은 자신을 구원해 주실 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기도에서는 귀를 기울이시고 환대해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을 내어 맡기고 신뢰하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이 시편 말씀에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일치시킬 때, 예수님께서 참행복으로 선포하신 말씀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이러한 경험은 달리 마땅하게 완전히 표현할 길 없는 특별한 경험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다른 이들, 곧 시편 저자가 그랬듯이 그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버림받고 소외당한 이들에게 전하기를 갈망합니다. 실제로 그 누구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서 외면당했다고 느껴서는 안 됩니다. 흔히 부의 증진을 으뜸 목적으로 삼고 우리를 고립으로 이끄는 세상에서 특히 그러합니다.

2. 이 시편에서는 가난한 이의 태도와 그가 하느님과 이루는 관계를 세 가지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부르짖다’가 나옵니다. 빈곤의 상황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으나 하늘을 가로질러 하느님께 가닿는 부르짖음이 됩니다.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이 그들의 고통과 고독, 낙심과 희망의 표현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현존하시는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이러한 부르짖음이 어째서 우리 귀에는 와닿지 못하고 우리가 무관심하고 무덤덤한 채로 남아 있게 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우리는 실제로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는지 진지하게 양심 성찰을 하도록 부름받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알아들으려면 경청할 수 있는 침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너무 많이 말을 하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계획들은 그 자체로 가치 있고 필요하다 할지라도 실질적으로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을 알아차리기보다는 그 계획을 시행하는 이들의 자기만족을 위해 추진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가난한 이들이 부르짖을 때에 그에 부응하는 응답을 하지 못하며 그들의 상황을 공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기도취에 빠져 직접적인 자기희생 없이 이타심의 몸짓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문화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3. 두 번째 동사는 ‘응답하다’입니다. 시편 저자가 전하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뿐만 아니라 이에 응답하십니다. 구원의 모든 역사가 증명하듯이, 주님의 응답은 가난한 이의 상황에 충만한 사랑으로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신과 아내 사라가 나이가 많아 자식을 가질 수 없었음에도 하느님께 자손을 갖고자 하는 소망을 아뢰었고 그때에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창세 15,1-6 참조). 모세가, 불에 타고 있지만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를 통해서 하느님 이름의 계시를 받고 이집트에서 주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받았을 때에도 그러했습니다(탈출 3,1-15 참조). 또한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광야를 떠돌아다니는 동안 내내, 곧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쳤을 때(탈출 16,1-6; 17,1-7 참조),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불충실하고 우상을 섬기는 최악의 비참한 상태로 타락했을 때에도(탈출 32,1-14 참조) 분명히 응답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은 언제나 구원을 주시는 개입입니다. 그리하여 상처 입은 몸과 영혼을 치유하시고 의로움을 되찾아 주시며 품위 있는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하십니다. 또한 하느님의 응답은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가 인간 본성의 한계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호소입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온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전하는 작은 응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어떤 형태로 어느 곳에 있든 가난한 이들이 자신들의 부르짖음이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작은 응답은 빈곤의 광야에서는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나눔의 표징이 되어 그들이 자신을 위해 활동하는 형제자매의 생생한 현존을 체험할 수 있게 합니다. 가난한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일부 대표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많은 이들이 직접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부조가 아마도 처음에는 유용하고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지지만, 믿는 이들의 관심은 이러한 부조의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그 사람에게 최상의 혜택을 주려고 노력하는 “사랑의 관심”(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199항)이 필요합니다.

 

4. 세 번째 동사는 ‘해방하다’입니다. 성경에서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존엄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개입하신다는 확신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가난은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이기심과 교만, 탐욕과 불의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만큼이나 오래된 악일 뿐 아니라, 늘 무죄한 이들까지 연루시켜 비극적인 사회적 결과를 초래하는 죄이기도 합니다. 해방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은 자신의 슬픔과 곤경을 하느님께 호소하는 이들을 향한 구원의 행위입니다.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이 가난의 굴레를 부수어 버리고 풀어 줍니다. 시편의 여러 편들은 가난한 이들이 각자 삶에서 만나는 이러한 구원의 역사를 노래하고 경축합니다. “그분께서는 가련한 이의 가엾음을 업신여기지도 싫어하지도 않으시고 그에게서 당신 얼굴을 감추지도 않으시며 그가 당신께 도움 청할 때 들어 주십니다”(시편 22[21],25).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우정과 친밀함과 구원의 표징입니다. “당신께서 저의 가련함을 굽어보시어 제 영혼의 곤경을 살펴 아시고 …… 제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습니다”(시편 31[30],8-9). 가난한 이들에게 “넓은 곳”을 준다는 의미는, 그들을 “새잡이의 그물에서”(시편 91[90],3) 해방시켜 주고 길목에 숨겨진 덫에서 구출하여 그들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평온한 마음으로 삶을 바라보게 해 줍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가난한 이를 향해 내미는 손의 모습을 띱니다. 이는 가난한 이들을 환대하고 보호하는 손, 그들이 필요로 하는 우정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손입니다. 이러한 구체적이고 뚜렷이 알 수 있는 친밀함에서 진정한 해방의 길이 시작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이 사회에 온전히 통합될 수 있도록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진보를 위한 하느님의 도구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귀담아 잘 들어주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187항).

 

5. 저는 수많은 가난한 이들이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바르티매오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동받았습니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마르 10,46)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10,47).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 외쳤습니다”(마르 10,48).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그 외침을 들으시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마르 10,51). 이 복음 이야기는 시편에서 선포된 약속을 상기시켜 줍니다. 바르티매오는 자신에게 시력과 노동력 같은 기본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오늘날에도 참으로 많은 길들이 위태로운 형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류가 진보를 이루었음에도, 기본 생계 수단들의 부족, 일할 수 있는 체력이 떨어지는 데에서 비롯되는 소외, 다양한 사회적 노예 형태 등이 존재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가난한 이들이 바르티매오처럼 길가에 앉아 자기 존재의 이유를 찾고 있습니까! 그들 가운데 참으로 많은 이가 그처럼 바닥까지 내몰린 이유를, 또한 거기서 벗어날 방도를 스스로 묻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다가와,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마르 10,49) 하고 말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정반대의 경우가 흔하게 일어납니다. 가난한 이들의 귀에는 자신들을 비난하는 목소리와 잠자코 있으라는 말이 들려옵니다. 마구잡이로 내뱉는 그 목소리는 흔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혐오로 완고함을 띱니다. 가난한 이들은 궁핍한 자들일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반경에서 유리되어 있고 결과적으로 거부하고 멀리해야 할, 불편과 불안을 몰고 다니는 자들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한 경향으로 가난한 이들과 우리 사이에 거리가 생겨납니다. 또한 그렇게 하여 우리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주 예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부르시어 위로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맞갖은 생활양식에 대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이러한 경우에 참으로 적절합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러한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1베드 4,8 참조), 의로움은 공정한 길을 갈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우리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이사 58,9 참조).

6. 가난한 이들은 가장 먼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그분께서 그들 삶 안에 가까이 계심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당신 약속에 충실하시기에, 밤의 어둠 속에서도 그분 사랑과 위로의 온기가 가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빈곤에 짓눌리는 상황을 극복하려면, 가난한 이들은 자신에게 관심을 쏟아 주고 마음의 문과 삶을 열어 자신을 친구처럼 가족처럼 느끼게 해 주는 형제자매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이러한 방법으로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이번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우리는 “가난한 이들은 배불리 먹으리라.”(시편 22[21],27) 하신 시편 말씀을 실천하도록 초대받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린 다음에 잔치를 벌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체험이 작년에 여러 교구들에서 거행한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가정의 따스함, 축제 음식의 기쁨, 소박하게 한 형제로 한 식탁에 모이고자 하는 사람들의 연대를 발견했습니다. 올해 그리고 또 앞으로도 이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우리의 하나 됨을 재발견하는 기쁨으로 지내기를 바랍니다. 한 공동체로 모여 기도하고 주일날 한 끼의 식사를 함께 나누는 것은 우리에게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되새기게 해 주는 경험입니다. 성 루카 복음사가는 이를 특유의 소박함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 2,42.44-45).

 

7.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날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온갖 가난을 접하면서 우리가 늘 가까이 있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수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신앙이 아니라 인간 연대 의식으로 추진하는 다른 사업들과 빈번히 협력함으로써, 우리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게 되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빈곤이라는 거대한 세계 안에서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역량은 제한적이고 미약하며 부족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협력하고 그 목표를 더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과 또 사랑의 명령을 따르지만, 우리와 어느 정도 동일한 목표를 지닌 또 다른 형태의 도움과 연대도 인정할 줄 압니다. 단, 모든 이를 하느님께 그리고 성덕으로 이끌어야 하는 우리의 본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경험들을 나누는 대화와, 주목받으려 하지 않고 기꺼이 협력하는 겸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적절하고도 온전히 복음적인 응답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일에서 첫자리를 차지하려는 경쟁은 가장 불필요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응답과 친밀함을 보여 주는 행동들을 북돋우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겸손하게 인정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길을 발견할 때, 바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그 첫자리에는 우리 눈과 우리 마음을 열어 회개로 이끄시는 바로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인공 의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자기가 한 선행을 감추고 잊어버릴 줄 아는 사랑입니다. 진짜 주인공은 주님과 가난한 이들입니다. 봉사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현존과 구원을 드러내시고자 손수 쓰시는 도구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그 당시 가장 영예로운 은사가 무엇인지 서로 경쟁하곤 하던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를 상기시켜 줍니다.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1코린 12,21). 바오로 사도는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하다고 밝히며 중요한 핵심을 지적합니다(1코린 12,22 참조).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우리는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특별히 소중하게 감쌉니다. 또 우리의 점잖지 못한 지체들이 아주 점잖게 다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점잖은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1코린 12,23-24). 이처럼,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 공동체에게 은사에 대한 기본 가르침을 전하면서, 복음에 비추어 더 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구성원들을 향한 공동체의 자세에 관해서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멸시나 지나친 온정주의를 키우는 자세는 그리스도 제자들과는 거리가 먼 자세입니다. 그리스도 제자들은 가난한 이들이 우리 가운데 참으로 현존하시는 예수님이시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을 우선시하라고 부름받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8.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이 세상 것과는 얼마나 구별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을 칭송하고 추종하고 모방하는 한편,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키고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하며 수치거리로 여깁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가운데 더 약하고 모자란 지체들과 이루는 연대에 복음적 충만함을 부여하라는 초대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코린 12,26). 이와 마찬가지로,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로마 12,15-16). 이것이 그리스도 제자의 소명입니다. 우리가 꾸준히 매진해야 하는 그리스도 제자의 이상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필리 2,5) 우리 마음이 더욱더 닮아 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9. 희망이 담긴 말은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지나치게 현재에만 매몰되어 있는 인생관이 우리의 무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러한 무관심을 흔히 가난한 사람들이 뒤흔들어 놓고는 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은 해방되리라는 확신을 나타내는 희망의 부르짖음이기도 합니다. 이 희망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합니다(로마 8,31-39 참조).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완덕에 이르는 길?(Camino de Perfección)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청빈이야말로 세상에 있는 모든 행복 중에도 행복이며, 어마어마한 왕국입니다. 그렇습니다. 청빈은, 이승의 모든 보화를 초개같이 여기는 이를 바로 그 주인이 되게 해 줍니다”(?완덕에 이르는 길?, 제2장 5항). 우리가 진정한 선을 식별할 수 있는 그만큼,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해지고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 앞에서 현명해집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富)에 올바르고 참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그만큼, 우리는 인류애를 키우고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10. 형제 주교님과 사제 여러분,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고자 안수를 받은 부제 여러분(사도 6,1-7 참조), 그리고 본당이나 연합회나 교회 운동들 안에서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교회의 응답을 직접 실천하고 있는 수도자와 평신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이번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특별한 때로 지내기를 당부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가 날마다 복음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 도우면서 우리를 복음화합니다. 이 은총의 기회를 헛되이 보내지 맙시다. 이 날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가난한 이들 앞에서 빚진 사람임을 기억합시다.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 때에 구원의 만남이 실현되고, 이 구원의 만남이야말로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여정에서 굳건한 믿음과 실천하는 사랑과 확신에 찬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바티칸에서
2018년 6월 13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프란치스코


<원문 Message of His Holiness Pope Francis, Second World Day of the Poor, This Poor Man Cried and the Lord Heard Him, 2018.6.13., 이탈리아어도 참조>

영어: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messages/poveri/documents/papa-francesco_20180613_messaggio-ii-giornatamondiale-poveri-2018.html      

이탈리아어: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it/messages/poveri/documents/papa-francesco_20180613_messaggio-ii-giornatamondiale-poveri-201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