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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한]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선종 160주년을 맞이하여 사제들에게 보내는 서한
   2019/09/16  11:3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 아르스의 본당 신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선종 160주년을 맞이하여 사제들에게 보내는 서한


형제 사제들에게,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아르스의 본당 신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이 선종한 지 160년이 되었습니다. 비오 11세 교황님께서는 그분을 전 세계 모든 본당 신부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셨습니다.1) 성인의 축일을 맞이하여, 저는 본당 신부뿐만 아니라, 조용히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여러분 공동체의 일상생활에 전념하고 있는 모든 형제 사제에게 이 서한을 보냅니다. 아르스의 본당 신부처럼, 여러분은 하느님 백성을 돌보고 동행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날마다 무수히 다양한 상황들을 마주하고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하며(마태 20,12 참조) ‘참호 안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각자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흔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희생을 무릅쓰며 피로와 병고와 슬픔 가운데에서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을 위하여 봉사하는 사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비록 힘겨운 여정이지만, 여러분은 사제 생활을 가장 멋지게 엮어 나가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곳에서 사제들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 때문에 공격과 비난을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얼마 전에 저는 이에 대한 염려를 이탈리아 주교님들과 공유하였습니다. 저는, 사제들이 자신의 주교를 형처럼, 아버지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주교는 형이요 아버지로서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사제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그들의 여정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사람입니다.2)

 

저 또한 나이 든 형이자 아버지로서 이 서한을 통하여, 여러분이 거룩하고 충실한 하느님 백성에게 베푸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 백성의 이름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사제 수품 일에 주님께서 크신 사랑으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결코 잊지 말라고 권고드립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 기쁨의 원천입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3)

 
고통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다”(탈출 3,7)

 

최근 우리는 성품 사제들의 권력 남용, 양심을 저버린 행위, 성적 학대로 피해를 당한 우리 형제자매들의 울부짖음을 더욱 분명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울부짖음은 자주 그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억눌려 왔습니다. 그러한 남용의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하느님 백성 전체도 큰 고통의 시간을 겪었음이 분명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사목적 배려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의 증진에 필요한 개혁을 수행하고자 한결같이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남용의 문화가 확산되거나 지속될 여지를 없애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제는 단시일에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모든 이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과거에는 묵과하는 것이 응답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회개, 투명성, 진정성, 피해자와의 연대라는 구체적 방식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를 열망합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온갖 형태의 인간 고통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4)  

 

사제들도 고통받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저의 교구와 다른 지역을 사목 방문하면서 사제들과 만나고 개인적으로 대화하면서 깨달았습니다. 많은 사제들이 발생한 사태에 대한 분노와 좌절을 표명했습니다. “그들은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많은 사람들의 의심과 두려움과 불신을 조장할 수 있는 혐의와 논란으로 피해를 겪어야 했기 때문입니다.”5) 저는 사제들에게서 이러한 심경을 토로한 많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한편, 피해자들과 하느님 백성의 고통과 아픔을 인지하고 함께 나누며 말과 행동으로 희망을 북돋아 주고자 애쓰는 사목자들을 보면서 위로를 얻습니다.

 

우리 형제들 가운데 일부가 끼친 피해를 부정하거나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를 위한 봉사에 충실하고 너그럽게 자신의 삶을 바친 모든 사제에게는 감사드려야 마땅합니다(2코린 12,15 참조). 그들은 울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 수 있는 영적 부성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제들이 종종 적대적이고 고립되거나 버려진 지역이나 상황에서, 심지어 목숨을 걸고 그들의 삶으로 자비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혼돈과 수모와 고통의 시기에, 여러분께서 복음을 위하여 기쁘게 삶을 바치며 보여 주시는 용감하고 한결같은 모범을 알고 있으며 소중히 여깁니다.6)

 

이 시기에 우리는 계속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교회 정화의 이 시간들을 통하여 우리는 더 큰 기쁨과 겸손을 지니게 되고 머지않은 미래에 풍성한 열매를 맺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부를 정화시키시고 우리 모두가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시험을 통하여, 주님 없이 우리는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음을 깨우쳐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선과 겉치레에 불과한 영성에서 구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간음하다 붙잡힌 당신 신부에게 당신의 성령을 불어넣으시어 그 아름다움을 되찾아 주십니다. 에제키엘서 16장을 다시 읽어보는 것도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교회의 역사입니다. 또한 우리는 저마다 이것이 나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여러분은 수모를 감내하며, 한결같이 목자로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끔직한 죄들 앞에서 그리고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하느님 용서 앞에서 조용히 눈물 흘리는 겸손한 참회야말로 우리 성덕의 시작입니다.7)

 

감사

 

“여러분 때문에 끊임없이 감사를 드립니다”(에페 1,16)

 

성소는 우리 자신의 선택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성소는 주님의 과분한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에 관한 복음 이야기를 계속 되새겨 보는 것이 좋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고 당신께서 뽑으신 이들을 부르시며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마르 3,14).

 

여기서 저는 저의 고국에서 훌륭히 사제 생활을 하셨던 루시오 헤라(Lucio Gera) 신부님을 떠올려 봅니다. 그분은 라틴 아메리카의 혼돈의 시기에 사제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언제나, 특히 시련의 시기에, 우리는 주님을 위한 봉사에 삶을 봉헌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체험한 바로 그 빛나는 순간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제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에 따라, 이는 “성소에 대한 두 번째 규범인 기억(deuteronomic memory)”, 곧 우리 성소를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기억입니다. 이 기억은 우리 각자가 “여정의 시작에서 받은 하느님 은총의 타오르는 빛”으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이 불꽃에서 저는 날마다 오늘을 위한 불을 밝히며 형제자매들에게 온기와 빛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 불꽃은 소박한 기쁨, 슬픔도 괴로움도 앗아갈 수 없는 기쁨, 선하고 온유한 기쁨이 타오르게 합니다.8)

 

우리 각자는 “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예.”는 “옆집의 성인들”9) 덕분에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품안에서 생겨나고 성장한 것입니다. “옆집의 성인들”은 그들의 겸허한 신앙으로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 “예.”는 예전에도 또 앞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을 지닙니다. 그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선익을 만듭니다. 어떤 사제가 오래 전에 세례를 주었던 어린이들이 이제는 어른이 되어, 연로해진 그 사제를 찾아와 각자 자기 가정을 소개하며 감사의 인사를 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러한 때마다, 우리는 다른 이에게 도유하고자 도유받았으며 하느님의 도유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바오로 사도와 함께, “여러분 때문에” 그리고 여러분의 모든 선행 때문에 “끊임없이 감사를 드립니다”(에페 1,16).

 

우리가 시련을 겪거나 나약해지거나 자신의 한계를 인식할 때, “무엇보다 최악의 유혹은 그 문제만 계속 곱씹고 있는 것입니다.”10) 그렇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시각과 판단력과 용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삶 속에 계신 주님의 현존에 대한 기억, 우리가 주님과 주님 백성을 위하여 우리 삶을 바치도록 이끌어 준 주님의 자애로운 눈길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은 중요하며 심지어 결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내할 힘을 얻고 시편 저자와 함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기”(시편 136[135]편) 때문입니다. 

 

감사는 언제나 ‘강력한 무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용서와 인내, 관용과 연민뿐만 아니라 사랑과 너그러움, 연대와 신의로 우리를 대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묵상하고 진심으로 감사드릴 때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삶과 사명을 (수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쇄신할 수 있는 생기를 주시도록 성령께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은총에 대하여 깨달을 때에, 우리는 경탄하고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기적의 고기잡이’를 하던 날 아침에 베드로처럼,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하고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다시 한번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사제 여러분, 자신이 맡은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일시적인 것들’이 중시되는 사회와 문화 안에서도 두려움 없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치는 약속을 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우리는 수없이 어겼을지언정, 하느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그 계약을 저버리신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기리도록 부름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한계와 죄에도 계속 우리를 신뢰하시고 믿으시고 지지해 주시며, 우리 또한 당신께 충실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음을 깨달을 때에(2코린 4,7 참조), 우리는 주님께서 약함을 통하여 승리를 거두시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2코린 12,9 참조).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지지해 주시고 부르시며 우리에게 백 배로 보상해 주시는 분이십니다(마르 10,29-30 참조).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기쁨으로 자기 삶을 봉헌한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기쁨은, 닫혀 있고 매몰찬 마음이 아니라 날마다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열린 마음이 되려고 여러 해에 걸쳐 노력하며 갈고 닦은 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신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풍미가 더해지는 좋은 포도주와 같습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주교와 형제 사제들과 이루는 형제애와 우정의 유대를 강화하고자 노력하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사제 여러분은 서로 지지해 주고, 병든 형제를 돌보며, 홀로 있는 형제를 찾고, 연장자를 찾아가 지혜를 배우며, 가진 것을 나누고, 함께 웃고 우는 법을 익히면서, 이러한 형제애와 우정의 유대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이러한 자리들이 필요합니다! 어려운 사명을 맡아야 했을 때에도, 형제 사제에게 그러한 책무를 맡겨야 할 때에도, 늘 충실하고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 주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목 임무를 통하여 인내와 ‘참을성’(hypomoné)을 보여 준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용감히 중개의 기도를 드리며 그러했듯이(민수 14,13-19; 탈출 32,30-32; 신명 9,18-21 참조), 우리도 목자의 담대함으로11)  기도 안에서 주님과 논쟁하곤 합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성찬례를 거행하고, 화해의 성사를 통하여 자비로운 사목 활동을 펼치고 있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엄격주의나 방임주의로 흐르지 않고 여러분이 돌보는 사람들을 깊은 관심으로 살펴보고,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베풀어 주시는 새 삶을 향한 회개의 여정에서 그들을 동행해 줍니다. 우리는 자비의 계단들을 통하여, 나약함과 죄를 비롯하여 인간이 놓일 수 있는 상황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완덕의 가장 드높은 데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12)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온기를 주고, 어둠 속에서 그들과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하고 칠흑 같은 밤을 함께 지내면서도, 우리의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13)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든 이에게 열정적으로 선포하고(2티모 4,2 참조) 도유하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자기 공동체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공동체가 하느님께 생생하고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고, 한때 사랑으로 넘쳤던 그 대화가 어디에서 끊어지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14)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진심으로 죄인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 주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온정과 연민을 보여 주는(루카 10,25-37 참조)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고통받는 형제자매 곁에 실제로 가까이 다가가 곁에 있어 주는 친밀함, 이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자기 형제자매들의 상처를 멀리하지 않고 직접 다가가 어루만지는 사제야말로 참으로 좋은 본보기입니다!15) 이는 자기 양 떼와 하나 되는 영적인 맛을 들인 목자의 마음을 반영해 줍니다.16) 목자는 자신이 그 양 떼 가운데에서 나왔음을 잊지 않고, 오직 그들을 섬김으로써만 자신의 더욱 순수하고 온전한 정체성을 찾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목자는 복음에 어긋나는 여러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충실한 하느님 백성의 성덕에 감사드립시다. 우리는 하느님 백성을 돌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우리 사제들도 돌보시고 보살피십니다. 주님께서는 충실한 하느님 백성을 알아볼 수 있는 은총을 우리 사제들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무한한 사랑으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 가정을 부양하고자 열심히 일하는 수많은 남녀, 병자들, 한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노(老) 수도자가 있습니다. 날마다 한결같이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에게서, 저는 투쟁 교회의 성덕을 봅니다.”17) 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그들의 증언에서 힘과 용기를 얻읍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용기

 

‘여러분이 마음에 용기를 얻기를 바랍니다’(콜로 2,2 참조)

 

저의 두 번째 큰 바람은, 바오로 성인의 말씀에서 울려 퍼지듯, 여러분과 함께 우리의 사제다운 용기를 새롭게 다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 용기는 무엇보다도 우리 삶 안에서 성령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열매입니다. 고달픈 시련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 모두는 위안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부름받은 사명이, 우리를 고통과 아픔과 심지어 오해에서 자유롭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18) 오히려 우리의 사명은 우리가 이를 직시하고 받아들이기를 요구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주님께서는 그러한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우리가 주님을 더욱 닮아갈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아파하고 기도하면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은총이 우리 안에서 더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진실하고 참된 성장의 여정을 이루는 그 잠재적인 선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19)

 

목자로서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아보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은, 자신이 시련 앞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 자문해 보는 것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레위인이나 사제처럼 대부분 땅 위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도 외면한 채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버리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루카 10,31-32 참조). 또 어떤 경우에는 “인생이 다 그렇지.” 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와 같은 상투적인 말 뒤에 숨어서 자신을 합리화하며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다 숙명론이나 실의에 젖어 버리고 맙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선호에 따라 선택적으로 다가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은 고립과 배척만 자아낼 따름입니다. “요나 예언자처럼, 우리는 안전한 피신처로 도망가고 싶은 유혹을 끊임없이 받습니다. 이러한 유혹에는 개인주의, 심령주의, 폐쇄주의가 있습니다.”20)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을 움직이기는커녕,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상처들에서, 결국 예수님의 상처들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만듭니다.21)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저는 또 다른 위험하고 교묘한 자세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이는 베르나노스가 즐겨 말한 대로 “악마의 가장 귀중한 영약”22) 이고,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우리에게는 가장 해로운 자세입니다. 이는 고아처럼 홀로 버려진 듯한 고독감이나 좌절감을 심어 주고 절망에 빠뜨리기 때문입니다.23) 현실에, 교회에, 또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실망했을 때, 우리는 달콤한 슬픔에 젖어 들고자 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동방의 교부들은 이를 권태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대하여 토마스 스피딕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사제로서의 이 삶, 다른 사람들과 맺는 인간관계, 우리가 혼자라는 사실에 대한 슬픔이 우리를 엄습할 때, 그 이유는 언제나 하느님의 섭리와 활동에 대한 믿음이 다소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슬픔은 우리가 한결같이 일하고 기도해 나갈 용기를 내지 못하게 우리를 마비시키고,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교회 저술가들 가운데 수도자들은 이 악습에 대하여 깊이 다루면서 이를 영성 생활에 가장 큰 적이라고 일컬었습니다.”24)

 

이러한 슬픔이 고착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슬픔은 우리 귓가에 대고 “늘 그렇게 해 왔잖아.”라고 나지막이 속삭이면서 악과 불의를 점점 더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슬픔은 불만과 적의를 품게 하여 변화와 회개를 위한 모든 노력을 수포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는 품위 있고 충만한 삶을 위한 선택이 아니고,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도 아니며,” 우리가 부름받은 삶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솟아 나오는 성령 안에서 사는 삶도 아닙니다.”25)  


 형제 여러분, 이 달콤한 슬픔이 우리 삶이나 우리 공동체를 엄습할 기미가 있을 때,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확고한 마음가짐으로 성령께서 “무기력한 우리를 일깨워 주시고 우리가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도록” 다 함께 간청합시다. “우리의 타성에 젖은 행동 방식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온 마음을 열도록 합시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의 살아 있으며 힘 있는 말씀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합시다.”26)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시련의 때에 우리 모두는 하느님과 형제자매의 위로와 힘이 필요합니다. 바오로 성인이 자신의 공동체들에게 한 감동적인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도 유익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겪는 환난 때문에 낙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에페 3,13). ‘여러분이 마음에 용기를 얻기를 바랍니다’(콜로 2,2 참조). 그래야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는 사명을 날마다 새롭게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명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루카 2,10) 전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주지적 이론이나 도덕적 이치를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주님의 도우심으로 변화되고 변모되어 욥처럼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하고 탄성을 올리게 된 사람으로서, 이 사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체험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은 좌절과 실의로 이어질 뿐입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는지”27)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 안에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여러 단계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나약함과 죄에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의 기쁨을 되찾아 주시는 온유함으로, 우리가 고개를 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것”28)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쁨은 우리의 의지나 지성적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기쁨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언제나 참되다는 것을 아는 믿음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시험에 들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루카 22,32).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그리고 저를 위하여 가장 먼저 기도하고 싸울 분이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도 당신의 기도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실제로 “겟세마니에서 예수님께서 드리신 기도에” 우리가 동참해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드리신 기도 가운데 가장 인간적이고 감동적인 기도입니다. …… 이 기도에는 탄원, 괴로움, 번민, 그리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착잡한 심경이 담겨 있습니다(마르 14,33 이하 참조).”29)

 

우리는 주님 앞에 머무르면서, 주님께서 우리 삶을 꿰뚫어 보시고 상처 입은 우리 마음을 치유하여 주시며 삶의 여정에서 세속주의에 찌들어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우리 발을 씻어 주시도록 그분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기도 안에서 우리는 복된 불안을 체험합니다. 이러한 불안은 우리가 주님 도우심이 필요한 제자들임을 일깨워 줍니다. 또한 이러한 불안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힘만을 믿고, 정해진 규범을 지키기 때문에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30) 자들이 지니는 프로메테우스적 성향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그 어느 누구보다 우리 사제들의 노고와 결실, 실패와 좌절을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29).

 

기도 안에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목자의 기도 안에는, “아빠! 아버지!”(갈라 4,6) 하고 외치고 계시는 영께서 머무시며, 자신에게 맡겨진 양 떼도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이중의 유대가 우리의 사명과 정체성을 밝혀 줍니다.

 

목자의 기도는 하느님 백성의 마음에서 자양분을 얻고 구체화됩니다. 그에게 맡겨진 이들의 고통과 기쁨의 표상들이 목자의 기도에 담겨 있습니다. 목자는 침묵 안에서 이들을 주님 앞으로 데려가 성령의 은총으로 기름 부음 받게 해 줍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 각자와 우리 공동체의 나약함을 치유하여 주실 것을 믿음으로 꾸준히 간구하는 목자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하느님 백성의 기도를 통하여 목자가 구체적이고 오롯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쉽고 빠르게 틀에 박힌 정답을 추구하는 데서 우리 모두를 벗어나게 해 줍니다. 이는 우리 나름의 방식과 목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희망의 길을 가리켜 주시는 분이신 주님을 따르게 해 줍니다. 사도행전에서 보여 주듯이, 초기 공동체의 삶에서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웠던 시기에 기도는 참으로 공동체를 이끄는 힘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렇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합시다. 또한 예수님께서 그 나약함을 변화시키시어 우리가 끊임없이 사명을 수행해 나갈 수 있도록 그분께 맡겨 드립시다. 우리는 그분의 ‘양 떼’이고 그분께서는 우리 주님이시며 목자이심을 깨닫게 된 그 기쁨을 잊지 맙시다.

 

용기 있는 마음을 지켜나가려면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이 이중의 유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 우리가 예수님과 이루는 유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가거나 예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할 때에, 우리 노력은 서서히 그러나 틀림없이 빛이 바래고 우리의 등잔에는 삶을 밝힐 수 있는 기름이 바닥나게 됩니다(마태 25,1-13 참조).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4-5).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영적 동반을 등한시하지 말라고 권고하고자 합니다. 전적인 신뢰와 열린 자세로 자신의 여정에 대하여 함께 대화하고 성찰하는 형제, 의논하고 식별하는 형제를 두십시오. 제자로서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슬기로운 형제를 두십시오. 그러한 형제를 찾고 만나 치유와 동반과 조언을 받는 기쁨을 누리십시오. 이는 여러분이 하느님 아버지 뜻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고(히브 10,9 참조) 여러분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필리 2,5)으로 고동치게 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도움입니다. 코헬렛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우리에게 참으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나으니 ……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으켜 준다. 그러나 외톨이가 넘어지면 그에게는 불행! 그를 일으켜 줄 다른 사람이 없다”(코헬 4,9-10).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또 다른 유대는 우리와 우리의 양 떼가 이루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증진하고 심화시켜 가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양 떼, 여러분의 사제단, 여러분의 공동체와 떨어져 있지 마십시오. 폐쇄적이고 엘리트주의적 집단에 갇혀 있어서는 더더군다나 안 됩니다. 이는 결국 영혼을 질식시키는 독이 됩니다. 용기 있는 교역자는 언제나 밖으로 나가는 교역자입니다. “밖으로 나감”을 통하여 우리는 “때로는 앞장서기도 하고, 때로는 가운데나 맨 뒤에서” 걷습니다. 교역자가 “앞장서는 것은 공동체를 이끌고자 함입니다. 가운데 서는 것은 격려와 지원을 위한 것입니다. 또 맨 뒤에 서는 것은 아무도 뒤처지지 않도록 공동체를 일치시키고자 함입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감각’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여정을 위한 새로운 길들을 찾아내는 감각, 곧 ‘신앙 감각’(교회 헌장 12항 참조)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31)  예수님께서는 몸소 우리를 하느님 백성 한가운데로 이끌어 주시는 이 복음화의 모범이십니다. 모든 이와 가까이 계시는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제사는 바로 그분의 온 생애를 특징짓는 복음화 방식의 정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사제 여러분, 우리 자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수많은 피해자들의 고통과 하느님 백성의 고통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에 이 무거운 짐을 몸소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분께서는 우리 사명을 새롭게 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의 사명은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 인간의 비참함에 주저 없이 다가가는 것,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직접 체험하여 성찬례로 바치는 것입니다.32) 해묵은 상처와 새로운 상처가 혼재하는 우리 시대에, 우리는 마음을 열고 신뢰하며 오늘날 하느님 나라가 가져올 새로움을 기다리면서 관계와 친교의 장인(匠人)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언제나 영원한 주님의 자비를 증언하도록 부름받는 용서받은 죄인들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찬미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합니다”(루카 1,46)

 

성모 마리아를 바라보지 않고서는 감사와 용기를 말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칼에 꿰찔린 여인이신 마리아께서는(루카 2,35 참조) 우리에게 찬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찬미에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열어 주고 현재에 대한 희망을 되찾게 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찬미 노래 안에는 성모님의 온 생애가 담겨 있습니다(루카 1,46-55 참조). 우리 또한 미래의 성취에 대한 약속인 이 노래를 부르도록 초대받습니다.

 

성모 순례지를 방문할 때마다 저는 성모님을 바라보고 성모님의 눈길 아래 머무르는 시간을 즐깁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거기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어머니 마음속 깊이 자신이 자리한다는 것을 아는 어린이와 같은 믿음, 가난하고 소박한 이의 믿음을 청합니다. 그리고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후안 디에고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시 한번 어머니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청합니다. “작디작은 내 아들아, 무슨 일이냐? 네 마음을 어지럽히지 마라. …… 네 어머니인 내가 여기 있지 않느냐?”33)

 

성모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온유한 사랑의 혁명이 지닌 힘을 믿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겸손과 온유가 나약한 이들의 덕이 아니라 강한 이들의 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강한 사람은 자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려고 다른 이를 홀대하지 않습니다.”34)

 

우리는 때때로 완고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할지 모릅니다. 냉소주의나 자기 연민의 강한 유혹이 우리 마음속에 뿌리내리려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하느님 백성의 살아 있는 중요한 지체임을 의식하는 데에 지치기 시작하거나 엘리트주의적 태도로 흐르려는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두려워 말고 성모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성모님의 찬미 노래를 부릅시다.

 

때로는 역사의 먼지 자욱한 길에서 동떨어져 우리 자신과 우리 일만 신경 쓰며 안주하려는 유혹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투쟁하고 기다리며 사랑하려 하지 않고 단지 후회와 불평, 비난과 조롱만이 우리 행동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때에는 성모 마리아를 바라봅시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깨어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막는 모든 ‘티끌’을 우리 눈에서 씻어 주시어, 당신 백성 한가운데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기념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길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지속적으로 회심해 나가기 어렵다면, 제가 있던 교구의 시인이자 훌륭한 본당 사제 한 분이 그러했듯 성모 마리아께로 돌아갑시다. 그 신부님은 성모님께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성모님, 오늘 저녁 저의 약속은 진지합니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를 위하여 열쇠를 밖에 놓아두시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35) 성모님께서는 “우리 생명의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을까 늘 살피시는 벗이십니다. 칼에 꿰찔린 영혼을 지니신 마리아께서는 우리의 모든 고통을 이해하시는 여인이십니다. 모든 이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정의를 낳을 때까지 산고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표징이십니다. …… 참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우리 옆에서 함께 걸어가시고 우리와 함께 싸우시며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36)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저는 “여러분 때문에 끊임없이 감사를 드립니다”(에페 1,16). 여러분의 헌신과 봉사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희망과 기대를 없애 버리는 가장 단단한 돌들인 죽음, 죄, 두려움, 세속주의조차 치워 주십니다. 인간의 역사는 무덤의 돌들 앞에서 끝나 버리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돌’(1베드 2,4)이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오늘 만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낙담하게 될 때에도, 실패에 비추어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될 때에도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자 그분께서 오시는 것입니다.”37) 

 

우리가 드리는 감사를 통하여, 찬미가 샘솟기를 바라고, 형제자매들을 희망으로 도유하는 우리 사명에 새로운 열정이 일깨워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오직 예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자비와 연민을 삶으로 증언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강복하시고, 동정 성모님께서 여러분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도 저를 위한 기도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형제애를 전하며,

로마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19년 8월 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프란치스코

 

1) 비오 11세, 서한 「희년」(Anno Iubilari), 1929.4.23., 『사도좌 관보』(Acta Apostolicae Sedis: AAS) 21(1929), 312-313면 참조.

2) 프란치스코, 이탈리아 주교회의에서 한 연설, 2019.5.20., 영적 부성을 지닌 주교는 자신의 사제들을 고아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 영적 부성은 주교가 사제들을 향해 기꺼이 문을 열어 놓을 때뿐만 아니라 그들을 돌보고 동반하기 위하여 찾아 나설 때에도 느껴질 수 있다.

3) 요한 23세, 회칙 「우리 사제직의 시작」(Sacerdotii Nostri Primordia), 1959.8.1., AAS 51(1959), 548면 참조.

4) 프란치스코, 하느님 백성에게 보낸 서한, 2018.8.20.,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59호(201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1면 참조.

5) 프란치스코, 사제, 수도자, 봉헌 생활자, 신학생과의 만남, 산티아고 데 칠레, 2018.1.16.

6) 프란치스코, 칠레의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에게 보내는 서한, 2018.5.31. 참조.

7) 프란치스코, 로마 교구 사제들과의 만남, 2019.3.7. 

8) 프란치스코, 부활 성야 강론, 2014.4.19.

9)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 2018.3.1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8(제1판), 7항.

10)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시련에 대한 소고(Las Cartas de la Tribulación), Herder, 2019, 21 참조.

11) 프란치스코, 로마 대교구 본당 사제들에게 한 연설, 2014.3.6. 참조.

12) 프란치스코, 자비의 특별 희년 기념 사제 영성 피정, 첫 번째 묵상, 2016.6.2.

13) Antonio Spadaro, “Intervista a Papa Francesco”, La Civiltà Cattolica quadèrno 3918, 2013.9.19., 462면.

14)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013.11.2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제1판), 137항.

15) 로마 대교구 본당 사제들에게 한 연설 참조.

16) 「복음의 기쁨」, 268항 참조.

17)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7항.

18) 프란치스코, 교황 교서 「자비와 비참」(Misericordia et Misera), 2016.11.20., 13항,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55호(2017),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95면 참조.

19)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50항.

20)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34항.

21)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희망의 성찰」(Reflexiones en Esperanza), 바티칸 시국, 2013, 14면 참조.

22) 조르주 베르나노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Journal d’un Curé de Campagne), 파리, 1974, 135면; 참조: 「복음의 기쁨」, 83항.

23) 성 바르사누피오, 「서간집」(Epistolario), Vito Cutro-Michał Tadeusz Szwemin, Bisogno di Paternità, 바르샤바, 2018, 124면 참조.

24) Tomáš Špidlík, L’arte di Purificare il Cuore, 로마, 1999, 47면.

25) 「복음의 기쁨」, 2항.

26)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37항.

27) 「복음의 기쁨」, 1항.

28) 「복음의 기쁨」, 3항.

29) 「희망의 성찰」, 26면.

30) 「복음의 기쁨」, 94항.

31)  프란치스코, 성직자와 봉헌 생활자와 사목평의회 위원들과의 만남에서 한 연설, 아시시, 2013.10.4.

32) 「복음의 기쁨」-270항 참조.

33) 과달루페 성모님의 발현에 관한 기록 Nican Mopohua, 107.118.119, 「복음의 기쁨」, 286항 참조.

34) 「복음의 기쁨」, 288항.

35) Amelio Luis Calori, Aula Fúlgida, 부에노스아이레스, 1946 참조.

36) 「복음의 기쁨」, 286항.

37) 프란치스코, 파스카 성야 미사 강론, 2019.4.20.

 

<원문: Letter of His Holiness Pope Francis to Priests, 2019.8.4., 영어와 이탈리아어 참조>

 

영어: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letters/2019/documents/papa-francesco_20190804_lettera-presbiteri.html

 

이탈리아어: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it/letters/2019/documents/papa-francesco_20190804_lettera-presbiteri.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