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장/총대리
Archbishop/Bishop
■ 이 소책자는... 꼭 「성령 안에서 대화」가 아니더라도, 함께 기도하고 대화하면서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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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날 : 2024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펴낸이 :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
엮은이 : 교구 사목연구소 오늘
「전례의 해」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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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과 외로움
“가장 비참한 빈곤은 외로움, 그리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입니다.” 콜카타의 데레사 성인이 남긴 말씀입니다. 일생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빈곤의 한가운데에 머물렀던 성인이지만, 물질적 가난 못지않게 외로움과 고립이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합니다. 기뻐도 함께 웃을 사람이 없고, 슬퍼도 함께 울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마태 11,17 세태는 무심함의 정도를 넘어 삶의 의미와 가치까지 뒤흔드는 경험이 됩니다.
친목과 친교
친목은 국어사전에 ‘서로 친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라고 나옵니다. 보통 친목을 다지자면 흥미로운 활동들을 함께하지요. 취미 생활을 같이하거나, 야유회를 가거나, 음식이나 술을 나누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이런 친목은 모두가 다 함께할 수도 없고, 때로는 하지 말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친목이 혈연, 지연, 학연 같은 연고주의로 변질되거나 ‘끼리끼리’ 모임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친교는 하느님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들, 어울리고 싶지 않은 사람도 받아들이고 인정해 주면서 각자가 하느님께 받은 소명을 살 수 있도록 도울 때 실현되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각각 다르면서도 하나이듯이, 우리도 각각 다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면서 일치를 이루는 게 친교지요.
친교의 기회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친교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첫 번째로 할 일이 전례입니다. 하느님 아니면 한자리에 모일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하느님 때문에 모여서 함께 하느님 말씀을 나누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나누고, 또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전례는 하느님을 만나고 이웃을 만나는 첫 번째 자리라고 할 수 있고, 또 참다운 친교를 시작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례의 집전자이신 그리스도
이 세상의 모든 전례를 통해 천사와 인간, 산 이와 죽은 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하늘과 땅을 포괄하는 우주적 전례를 집전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136~1139 참조) 전례는 순전히 우리 힘으로 만들어 낸 예식이 아니고, 사제가 주연을 맡고 교우들이 조연을 맡는 공연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전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봉사이고 그다음으로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봉사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이웃과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만나는 시간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전례는 우리가 고립과 외로움을 벗어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홀로 버려져 있지 않음을, 하느님 안에서 어떤 분열과 갈등도 넘어서 형제자매로 만날 수 있음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함께 구원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만남의 시간에 초대받았습니다.
사목교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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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경험한 전례는 어떠했나요? 어떤 경험이 나에게 기쁨을 주고 또 어떤 경험이 어려움이나 실망을 주었나요?
2.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삶과 하느님께 받은 사랑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삶은 어떻게 다를까요?
우리 본당은 이렇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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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금기
예부터 사람들은 신(神)을 만나고 특별한 복을 얻으려면 세속과 구별되는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려면 부정을 타지 않도록 피하고 가릴 것이 많았습니다. 힌두교도가 소를, 무슬림이 돼지를 먹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피부병 환자나, 심지어 왼손잡이처럼 조금이라도 남들과 달라 보이는 사람도 피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적 금기를 이유로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소외시키곤 했습니다.
게다가 신에게 가까이 가려면 특별한 제물을 바쳐 환심을 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일상에서 신을 만나 축복을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오직 형편이 되는 사람, 특별한 사람들만이 신을 가까이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예배와 율법
하지만 구약의 백성들은 야훼 하느님을 만나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탈출하면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만난 하느님은 조상들을 부르시고 계약을 맺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 활동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배를 드리면서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시는 해방과 구원을 지금 일어나는 일로 체험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백성들은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와 하느님의 법을 지키는 율법이라는 두 기둥을 하느님을 만나는 중심으로 삼고,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구약의 백성 중에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 그 자체보다 깐깐한 예배 규정과 율법에 집착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의 조상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내리신 하느님, 노예살이에서 해방 시키신 하느님, 현재와 미래에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 뒷전으로 밀려날 판이었습니다.
새 계약, 새로운 예배
그런 가운데 성자 예수께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시며,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가 되는 근본 조건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은 형제에 대한 용서와 사랑입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영적이고 참된’(요한 4,24) 예배, 곧 당신 자신이 그렇게 살고 본보기가 되신 것처럼 자신의 삶 전체를 봉헌하는 새로운 예배를 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제물로써 봉헌하심으로써 우리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파스카의 신비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합당한 예배
성부께 대한 완전한 복종과 인류에 대한 봉사의 삶을 산 예수께서는 지상 생활을 마치실 때 빵을 쪼개어 나누고 포도주를 함께 마시는 행위를 통해 당신의 삶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행위를 통해 자신의 생명을 제자들에게 넘겨줌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삶을 ‘하느님께는 합당하고 형제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봉헌물’로 바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례와 삶
오늘도 우리는 전례를 통해서, 특히 성체성사를 통해서 이 신비에 참여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주시어 우리도 당신에게 우리 자신을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우리도 참여하는 것입니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갈’(창세 3,19) 인간의 보잘것없던 삶에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리게 되며, 하느님은 우리 삶 속에서 당신 삶을 사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례로 힘을 얻은 우리는, 우리 삶 전체를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봉헌합니다. 전례는 전례 공간 안에서만 효력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전례를 통해서 거룩함을 체험하는 우리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 거룩함을 증언하게 됩니다.
사목교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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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깐깐한 전례 규정과 성경에만 집착하다가 하느님의 본질이신 사랑이나 너그러움을 잊어버렸던 적이 있습니까?
2.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나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었음을 깨달았던 경험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본당은 이렇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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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불러 모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탄생에서부터 한결같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초라한 구유에 나셔서 가난한 목동들과 이방인들의 경배를 받으신 탄생부터 그랬습니다. 세례 때 삼위일체의 친교를 드러내신 다음에는 다양한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뭇 사람들이 피하고 따돌렸던 이들도 예수님을 통해서 공동체에 속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시는 그리스도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가 15, 7)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에게도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여시는 아버지의 비유는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내린 벌을 받았다며 돌을 맞던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해주시고 공동체로 돌아가도록 해주셨고(마태 8,1~4 참조), 죽임을 당할 뻔한 간음한 여인도 구하셨습니다.(요한 8,3~11 참조) 부정한 방법으로 돈은 모았던 탓에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할 수 없었던 세리 자캐오에게 새 삶의 길을 열어주신 분도 예수님이셨습니다.(루카 19,1~10 참조) 예수님은 순수하고 완벽한 엘리트들만 모으신것이 아니라 죄인들도 모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넘어진 이들에게는 새롭게 일어날 힘을, 제 길을 잘 걸어가는 이들에게는 겸손과 형제애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형제자매들이 함께 찬미하는 하느님
모든 성사와 전례는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불린 사람들이 서로를 형제자매로 알아보고 만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세례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결해 주면서 그분의 공동체에 연결해 줍니다. 견진성사가 선물하는 그분의 영은 곧 교회 공동체의 영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고, 우리는 같은 몸과 피를 나누며 한몸을 이룹니다. 병자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강하게 해주시는데, 그 성사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혼인성사와 성품성사는 가정과 교회 안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감당해야 할 일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해낼 수 있도록 돕습니다.
두 개의 천국
복자 황일광 시몬(1757~1802)은 전례와 성사 안에서 형제 자매를 만나는 아름다운 모범을 보여줍니다. 그는 백정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아주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가난과 노역은 물론이고, 천한 신분에게 주어진 멸시와 모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을 접한 후에 그는 새로운 삶을 맛보게 됩니다. 교우들은 황 시몬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를 애덕으로 감싸주었습니다. 양반집에서도 다른 교우들과 똑같이 받아들여 같은 방에 앉아 함께 기도했습니다. 이에 감격한 황 시몬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황 시몬은 박해 속에서도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 하게 됩니다. 사람들 사이의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 함께 전례를 거행할 때,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로마 10,12)
사목교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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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안에서 대화」를 위한 질문
1. 신앙의 길은 홀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혹시 함께 걸어가는 신앙의 동반자들사이에 편을 나누거나 사람을 가리지는 않았나요?
2. 교회가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도 하느님 사랑의 초대장을 전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우리가 도울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 본당은 이렇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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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상징
요즘은 사극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지만, 예전에는 이른 새벽에 맑고 정결한 우물물을 길어 놓고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정화수라고 부르는 이 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가장 간소하지만 가장 정갈한 제수(祭水)로서 비는 사람의 맑은 마음이 투영된 상징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마음과 생각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와 상징적인 사물들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과 신의의 표지로 결혼반지를 주고받고, 어버이날에는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게 상징들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은 사물의 가치를 깊은 차원에서 알아볼 줄 압니다.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내미는 작은 선물에 감격하는 부모가 그 선물의 가격을 따지겠습니까? 손주 용돈 하라며 꼬깃꼬깃한 지폐를 쥐여주시는 할머니께 액수가 적다고 투정 부릴 수 있겠습니까? 사물의 이 깊은 상징적 의미와 가치를 알아보는 능력이 커질수록 우리 삶은 더 풍성해지고 내면의 깊이도 더해집니다.
모든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하느님
그래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사시며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인간의 표징들을 사용하십니다. 빵과 포도주, 세례수, 성령을 상징하는 도유, 안수 같은 것들이 그 예입니다. 이런 일상의 사물들을 통해 전례를 거행할 때, 우리는 사물이 가진 가치와 깊이를 새롭게 발견합니다. 그저 쓰고 버리는 대상으로 생각했던 피조물들이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구원의 역사에서 나름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었고, 궁극적으로 그분의 것입니다.(신명 10,14 참조) 예수께서는 ‘두닢 값어치밖에 안 되는 참새 다섯 마리 중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루카 12,6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아버지의 것인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제자들이 이해하도록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포도나무, 올리브 나무, 물고기, 참새, 뱀이나 전갈처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사물들에 빗대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강생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아버지께 올라가신 말씀을 만나도록 피조물 전체가 안배되었습니다”(『나는 간절히 바랐다』,
42항)라고 말씀하십니다.
피조물의 찬가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 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들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신 땅과 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성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피조물의 찬가』 중에서)
모든 피조물의 가치와 의미를 꿰뚫어 본 프란치스코 성인이 이 아름다운 노래를 지었을 때, 성인은 오랜 병고 속에 거의 눈먼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성인은 다른 피조물과 함께 창조주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참된 믿음은 인간의 마음에 힘을 줄 뿐만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고, 다른 이들과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맺는 연대를 비추어 줍니다.(『하느님을 찬미하여라』, 61항)
사목교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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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기후위기는 가장 약한 이들에게 가장 가혹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례를 통해서 생태와 생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깊은 연대를 표현하자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2. 쓰고 버리는 문화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함께 살아가는 생명의 문화를 꽃피우는 데 전례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 전례를 거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본당은 이렇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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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좀 더 알았더라면...
좀 오래전 일이다. 미사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며 잠시 눈을 감고 묵상하던 중이었다. 뒤편에서 어떤 할머니께서 못마땅한 듯 혼잣말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니, 성당 안에서 모자 쓰면 되나. 미사 한다 카면서 모자를 쓰고 앉았으면 우짜노. 모자 벗어라 캐라.” 연이어 채근하는 말씀에 눈을 떠 살펴보니, 정말 제일 앞쪽 의자에 털모자를 쓴 여성 신자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때만 해도 미사 중에 미사포가 아닌 털실로 짠 모자를 쓴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몇 차례 더 불평을 늘어놓자 주위 신자들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호기심 어린 압력과 눈길이 그 신자에게 닿았는지 그분도 몸을 약간 돌려 뒤편을 보는 듯했다. 그러자 옆에 함께 앉아 있던 자매님이 조용히 뭐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은 뒤로 조용히 전해져 내 자리, 내 뒤편의 할머니에게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자매님이 지금 항암 중인데 머리카락이 다 빠져서 그걸 가리려고 할 수 없이 쓰고 온 거예요.” 순간 사람들은 정말 미안하고 난감해하였다.
어느 자매님이 겪은 일입니다. 전례 규칙과 예의를 따지기 전에 그 사정을 이해하려고 했었다면 누구도 상처를 받거나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습니다.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거행하는 전례에서 비슷한 일들이 가끔 생기는 것을 봅니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고, 또 전례의 뜻을 몰라서 생기는 오해 말씀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대화에 인색하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더 많이 대화하고 더 깊이 경청한다면 전례를 더 아름답고 거룩하게 거행할 수 있습니다. 전례의 상징들이 뜻하는 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전례의 각 부분에 걸맞은 마음가짐과 행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우리는 대화하는 가운데, 전례를 준비하는 많은 이들의 수고와 헌신을 알고 감사할 수 있게 되지요. 전례에 쓰이는 도구들을 정성스레 준비해 주시는 분들, 시간을 내서 연습하고 화음을 맞추는 분들,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독서대와 해설대에 서는 분들, 전례가 이루어지는 공간을 관리해 주는 분들, 제대 위에서 봉사하시는 분들, 무엇보다 함께 전례에 참석해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모든 참석자들은 참으로 감사한 분들입니다. 전례의 해를 지내면서 우선 대화부터 시작합시다. 전례에 대해서 궁금한 것들, 쑥스러워서 차마 물어보지 못했던 것들도 기탄없이 물어보고 의견을 나누는 자리를 만들어 봅시다.
성령 안에서 대화
막상 대화를 하려고 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난감하다면, 지난 2021년 세계 시노드에서부터 전 세계 교회가 쓰고 있는 「성령 안에서 대화」를 해봅시다. 성령 안에서 대화는 누구도 말을 독점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서로를 비판하거나 논쟁하지 않으며 서로를 경청하는 대화 방법입니다. 이렇게 서로를 경청하고, 또 대화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마침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성령께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교회를 생기 있게 만드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성경 말씀 속에 살아 있으며, 성사의 거룩한 표징 속에 현존하십니다. 또 성령은 신자들의 마음속에 살며, 그들의 기도 속에서 이야기하십니다. 성령은 신자들을 인도하고 특별한 은사들을 선사하십니다. 성령께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은 오늘날에도 진정한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목교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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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많은 사람들이 전례 봉사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로 타인의 평가와 비판이 두렵고 자신의 준비가 미흡한 점을 들고 있습니다. 더 많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전례에 봉사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2. 전례에 관해 궁금했던 것을 한 가지씩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 본당은 이렇게 합니다
우리 본당은 손님 신부님을 초청할 필요가 없다. 본당 신부님이 매 미사의 강론을 특강처럼 해주시기 때문이다. 독서나 복음 또는 전례 시기에 맞는 역사, 지리적 배경을 소개하고 용어에 대한 어원이나 의미를 신자들의 수준에 맞게 풀이하여 설명해 주심으로써 어려운 성경 구절이나 이해하기 힘든 구절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자연스럽게 내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미사 때마다 성령의 기운을 느끼며 가슴 벅찬 감동을 안고 파견 성가를 부르며 하느님의 은총을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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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안에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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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 안에서 대화」는 12명 이하의 공동체나 모임에서 적절한 대화 방법입니다. 12명이 넘으면, 적절하게 조를 나누어 활용하시면 좋습니다.
● 나눔 내용을 기록할 서기와 전체 대화를 이끌어 줄 진행자(촉진자, facilitator)를 먼저 정합니다.
● 묵상과 성찰을 나눌 때 참가자들은 정해진 시간을 넘지 않도록 합니다.(모래시계나 타이머 등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 전체 소요 시간은 2시간~2시간 30분입니다. 충분히 여유있는 시간과 장소를 준비하시도록 권합니다.
1. 이 모임은 토론이나 논쟁의 시간이 아니라 영성적 대화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함께하여 주시기를 청하고, 성령께서 어디로 이끌고 계시는지에 집중합니다.
2. 이 모임에서 성령께서 함께하시도록 묵상과 침묵의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각자 이야기하는 시간도 정확하게 지키도록 합니다.
3. 말하는 용기와 더불어 경청하는 용기와 겸손이 필요합니다.
4. 말을 할 때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 느낌 등을 가능한 한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5. 들을 때에는 다른 사람이 말하는 내용뿐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성령께서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지 알아차리도록 노력합니다.
6. 다른 사람이 말하는 있는 동안에는 내 차례에 무슨 이야기를 할지 생각하기보다 그 사람의 이야기에 마음을 열고 집중합니다.
7.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듣습니다. 그가 하는 말의 내용뿐 아니라 그의 목소리의 톤과 느낌까지 공감하고자 노력합니다.
8. 다른 이로부터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내 생각을 기꺼이 바꿀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지닙니다.
9. 예전부터 해왔던 것들에 안주하려는 마음과 편안함을 찾는 태도나 편견과 고정관념을 내려놓습니다.
10. 서로에게 배우고, 함께 배우며, 서로 섬기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11. 하느님의 이끄심을 따르는 대신 우리 스스로 이끌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합니다.
12. 잘 풀리지 않는 문제점들에만 머물러서 낙담과 회의감에 빠지지 않도록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과 빛을 향해 나아갑니다.
1. 시작기도
● 시작기도로 「성령 안에서 대화를 위한 기도」(30쪽)를 바치겠습니다.
▷ 시작 기도 후 서로 간단한 자기 소개와 인사를 합니다.
2. 개인적 준비
성부께 자신을 맡겨 드리고, 주님이신 예수님과 기도 안에서 대화하며, 성령께 귀 기울이면서, 각자 식별하도록 부름받은 질문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준비합니다.
[침묵,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
● 주제는 ‘아름답고 거룩한 전례’입니다.
▷ 진행자는 참가자 중에 한 사람이 주제 자료를 낭독하도록 요청합니다. 참가자들은 주제에 대한 설명과 자신의 성찰을 떠올리고 정리합니다.
● 주제 ‘아름답고 거룩한 전례’와 관련하여 나의 신앙 체험 안에서 어떤 울림이 있는지 2분간 묵상하겠습니다.
3. 말하고 듣기 - <나눔 1>
각 주제에 주어진 질문에 대해 자신의 경험과 기도에 비추어 발언하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주의 깊게 경청합니다. 각 주제에 주어진 질문 중 선택할 수 있습니다.
● 각자 개인 성찰의 내용을 2분을 넘지 않게 나눕니다. 자신이 무엇을 말할까 고민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발표하는 내용을 주의 깊게 듣습니다.
▷ 3명이 발표하면 2분간 묵상합니다. 이어서 3명씩 발표할 때마다 2분간 묵상합니다. (3명 발표 - 2분 묵상 - 3명 발표 - 2분 묵상 - 3명 발표)
4. 침묵과 기도 (1)
● 우리가 함께 나눈 이야기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 2분간 성찰하겠습니다.
5. 다른 이들과 하느님께 공간을 내어주기 - <나눔 2>
다른 이들이 말한 것에서 각자 가장 깊이 공감한 것 또는 저항감을 일으킨 것을 나누되,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도록 맡깁니다. “우리가 들을 때 가슴 안에서 나의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 나눔 대화 중에 들은 이야기 가운데 가장 깊은 울림이 있는 것은 무엇인지, 2분 이내로 나누겠습니다.
▷ 3명이 발표하면 2분간 묵상합니다. 이어서 3명씩 발표할 때마다 2분간 묵상합니다. (3명 발표 - 2분 묵상 - 3명 발표 - 2분 묵상 - 3명 발표)
6. 침묵과 기도 (2)
● 우리가 함께 나눈 이야기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 3분간 성찰하겠습니다. 성찰하는 동안 서기는 지금까지 나온 대화 내용을 정리해 주십시오.
7. 함께 이룩하기- <나눔 3>
성령 안에서 대화의 열매를 식별하고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앞의 대화에서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함께 대화합니다. 즉 통찰과 수렴된 것을 인식하고, 이견과 방해 요소, 새로운 질문을 확인하며 예언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합니다. 이 작업 결과가 자신을 대표한다고 모두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어떤 단계로 함께 가도록 부르고 계신가?”
● 서기는 정리한 내용을 읽어 주십시오. 정리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다른 분들은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서기가 정리하고 읽은 내용에 대해 수정하거나 보충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 오늘 성령 안에서 대화 모임에 대한 소감과 제안을 각자 2분 이내로 나누겠습니다.
▷ 3명이 발표하면 2분간 묵상합니다. 이어서 3명씩 발표할 때마다 2분간 묵상합니다. (3명 발표 - 2분 묵상 - 3명 발표 - 2분 묵상 - 3명 발표)
8. 마침기도
● 오늘 성령 안에서 대화 모임을 통해 우리 공동체를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마침 기도를 바치겠습니다.
“주 성령님, 저희가 주님 앞에 있나이다.”
(Adsumus Sancte Spiritus)
주 성령님,
저희가 주님 앞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주님 앞에 있나이다.
주님 만이 저희를 이끄시니 저희와 함께하시고
저희 마음에 머무소서.
저희가 나아갈 길을 보여주시고
해야 할 일을 가르치소서.
나약한 죄인인 저희가 정의를 외면하여
혼란을 일으키지 않게 하시고
무지의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또한 아무도 차별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가 주님 안에서 하나 되어
영원한 생명의 길을 함께 걸어가게 하시고
저희가 언제나 진리를 따르며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영원히 친교를 이루시며
언제 어디서나 저희를 도우시는 성령께
이 모든 것을 간청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