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더보기
슬라이드배경

교구장/주교

Archbishop/Bishop

부교구장 말씀
하느님 자비에 대한 기억 (욱수성당 견진성사 강론)
  •   2026-09-15
  •   592

욱수성당 견진성사

 

2026. 9. 13.

 

사랑하는 욱수본당 교우 여러분, 그리고 견진을 받기 위해 하느님 앞에 나오신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 은총 안에서 모두 평안하신가요? 네, 저도 평안하게 대구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교우분들의 사랑과 기도의 덕택입니다.

 

오늘 견진을 받는 분들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갈길이 바쁘네요. 얼른 견진성사를 드려야 여러분도 주님의 더욱 특별한 사랑 안에 머무실 것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여러분 견진성사 받으시면 어떻게 사실 거예요? 더 착하게요? 휴! 사실 어려운 숙제를 떠안는 날인가 보네요?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느님께서 견진을 통해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큰 숙제처럼 여겨지는 주제를 들고 나오셨습니다. ‘일곱 번 용서하면 될까요?’ 하고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너무 관대하고, 훌륭한 제안입니다. 이 정도 하실 수 있으세요? 

 

우리의 자연스런 감정으로 돌아가면, 나를 아프게 한 사람에게 미움과 분노의 마음이 들고, 복수하려 합니다. 창세기에는 이런 말씀이 나오죠. “카인을 해치는 사람이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치는 사람은 일흔 일곱배로 앙갚음을 받는다” (창세기 4,24) 하느님께서 카인과 후손을 해치면 복수해주실 것을 말하죠. 이것이 어찌보면 우리 바람일지도 모릅니다.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이 있다면 몇 곱절로 하느님께서 벌해 주시고, 나도 그를 단죄할 때 정의가 세워지고 삶이 바로 설 것이란, 그런 소망을 우리는 가지고 있죠.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 알아듣기 어렵고, 부자연스럽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착하고 선한 사람이 되라고, 하고 되묻고 싶어집니다. 

 

우리 상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아픔도 사라지지 않잖아요? 그래서 용서는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복수를 못하면, 정의를 실현해 내지 못한 자신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며 살아갈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착한사람이 되라는 윤리적 훈계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삶으로 건너오라는 초대입니다. 그 분의 비유 말씀을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임금 앞에 섭니다. 그는 말합니다.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제가 곧 갚겠습니다.”(마태 18, 26) 과연 가능할까요? 이 액수는(33톤의 은, 약 5천억) 가능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액수의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놀라운 것은 임금이 그가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그의 빚을 모두 탕감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무얼 말씀하시는 걸까요?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도저히 탕감받을 가능성이 없는 죄를 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죄를 ‘탕감 받았음’을 기억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다음 행동은 우리의 행동과 많이 닮았조.

그는 탕감받은 액수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적은 액수의 빚을 진 동료를 만납니다. 그리고는 그가 간청함에도 불구하고 멱살을 잡고, “빚을 갚아라” 하고 무한한 자비를 입은 자신을 잊고, ‘정의의 셈’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바라봐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에게 빚을 진 사람의 ’빚‘일까요? 아니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임금의 연민의 마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사람의 잘못은, 정의로운 계산을 요청함 보다, 자신이 탕감받은, 자신이 갚을 수 없을 만큼의 빚을 탕감 받은 은총을 입은 자임을 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용서 할수 있을까요? 힘듭니다. 

우리는 누구를 용서하기 전에, 그가 나에게 얼마나 비굴하고, 비참하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용서를 청하는가, 를 먼저 보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앙갚음으로 후련해지려는 보상받고 싶은 정의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 우리가 탕감받은 사실을 먼저 바라보고, 기억해야 합니다.  용서는 기억함 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무엇을 해주셨는가를 기억하라”. 용서는 우리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기억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용서가 이루어지는 순간은 그저 가해자에게 자유가 되찾아지는 시간을 넘어 용서하는 사람도 과거의 원한과 감옥에서 해방되는 모두에게 기쁨이 되는 축제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차원의 삶은, 내 마음의 정의를 목적으로 원한과 미움과 증오의 굴레에서 허덕이는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를 얻고 삶의 기쁨을 얻는 길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한 없는 용서를 베푸시는 주님의 자비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 심장의 피와 물을 쏟으시기까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자신을 바치시는 하느님 사랑을 기억하라고 초대합니다.

 

거기에서 용서는 솟아나고, 우리를 이웃과 화해하도록 이끌고, 우리 자신과도 화해하며 하느님과 일치하는 축제의 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견진을 받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서 신앙의 차원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에로 부르시는 그 분의 초대에 기꺼이 ‘네‘ 하고 응답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주시기를 청하면서 이제 견진성사를 집전하겠습니다. 

2026. 9. 13.

 

사랑하는 욱수본당 교우 여러분, 그리고 견진을 받기 위해 하느님 앞에 나오신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 은총 안에서 모두 평안하신가요? 네, 저도 평안하게 대구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교우분들의 사랑과 기도의 덕택입니다.

 

오늘 견진을 받는 분들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갈길이 바쁘네요. 얼른 견진성사를 드려야 여러분도 주님의 더욱 특별한 사랑 안에 머무실 것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여러분 견진성사 받으시면 어떻게 사실 거예요? 더 착하게요? 휴! 사실 어려운 숙제를 떠안는 날인가 보네요?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느님께서 견진을 통해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큰 숙제처럼 여겨지는 주제를 들고 나오셨습니다. ‘일곱 번 용서하면 될까요?’ 하고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너무 관대하고, 훌륭한 제안입니다. 이 정도 하실 수 있으세요? 

 

우리의 자연스런 감정으로 돌아가면, 나를 아프게 한 사람에게 미움과 분노의 마음이 들고, 복수하려 합니다. 창세기에는 이런 말씀이 나오죠. “카인을 해치는 사람이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치는 사람은 일흔 일곱배로 앙갚음을 받는다” (창세기 4,24) 하느님께서 카인과 후손을 해치면 복수해주실 것을 말하죠. 이것이 어찌보면 우리 바람일지도 모릅니다.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이 있다면 몇 곱절로 하느님께서 벌해 주시고, 나도 그를 단죄할 때 정의가 세워지고 삶이 바로 설 것이란, 그런 소망을 우리는 가지고 있죠.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 알아듣기 어렵고, 부자연스럽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착하고 선한 사람이 되라고, 하고 되묻고 싶어집니다. 

 

우리 상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아픔도 사라지지 않잖아요? 그래서 용서는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복수를 못하면, 정의를 실현해 내지 못한 자신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며 살아갈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착한사람이 되라는 윤리적 훈계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삶으로 건너오라는 초대입니다. 그 분의 비유 말씀을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임금 앞에 섭니다. 그는 말합니다.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제가 곧 갚겠습니다.”(마태 18, 26) 과연 가능할까요? 이 액수는(33톤의 은, 약 5천억) 가능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액수의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놀라운 것은 임금이 그가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그의 빚을 모두 탕감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무얼 말씀하시는 걸까요?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도저히 탕감받을 가능성이 없는 죄를 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죄를 ‘탕감 받았음’을 기억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다음 행동은 우리의 행동과 많이 닮았조.

그는 탕감받은 액수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적은 액수의 빚을 진 동료를 만납니다. 그리고는 그가 간청함에도 불구하고 멱살을 잡고, “빚을 갚아라” 하고 무한한 자비를 입은 자신을 잊고, ‘정의의 셈’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바라봐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에게 빚을 진 사람의 ’빚‘일까요? 아니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임금의 연민의 마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사람의 잘못은, 정의로운 계산을 요청함 보다, 자신이 탕감받은, 자신이 갚을 수 없을 만큼의 빚을 탕감 받은 은총을 입은 자임을 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용서 할수 있을까요? 힘듭니다. 

우리는 누구를 용서하기 전에, 그가 나에게 얼마나 비굴하고, 비참하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용서를 청하는가, 를 먼저 보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앙갚음으로 후련해지려는 보상받고 싶은 정의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 우리가 탕감받은 사실을 먼저 바라보고, 기억해야 합니다.  용서는 기억함 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무엇을 해주셨는가를 기억하라”. 용서는 우리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기억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용서가 이루어지는 순간은 그저 가해자에게 자유가 되찾아지는 시간을 넘어 용서하는 사람도 과거의 원한과 감옥에서 해방되는 모두에게 기쁨이 되는 축제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차원의 삶은, 내 마음의 정의를 목적으로 원한과 미움과 증오의 굴레에서 허덕이는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를 얻고 삶의 기쁨을 얻는 길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한 없는 용서를 베푸시는 주님의 자비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 심장의 피와 물을 쏟으시기까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자신을 바치시는 하느님 사랑을 기억하라고 초대합니다.

 

거기에서 용서는 솟아나고, 우리를 이웃과 화해하도록 이끌고, 우리 자신과도 화해하며 하느님과 일치하는 축제의 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견진을 받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서 신앙의 차원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에로 부르시는 그 분의 초대에 기꺼이 ‘네‘ 하고 응답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주시기를 청하면서 이제 견진성사를 집전하겠습니다. 

번호 제목 등록일 조회
12 하느님 자비에 대한 기억 (욱수성당 견진성사 강론)
  • 번호 :  12
  • 등록일 :  2026-09-15
  • 조회 :  592
2026-09-15 592
11 이웃을 향한 성심의 사랑 (관덕정 후원회원 미사 강론)
  • 번호 :  11
  • 등록일 :  2026-09-07
  • 조회 :  661
2026-09-07 661
10 이미 와계신 하느님 (대신학원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미사 강론)
  • 번호 :  10
  • 등록일 :  2026-09-07
  • 조회 :  629
2026-09-07 629
9 생명을 향한 길 (창조시기 개막미사 강론)
  • 번호 :  9
  • 등록일 :  2026-09-03
  • 조회 :  514
2026-09-03 514
8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 믿음 (압량성당 30주년 기념미사 강론)
  • 번호 :  8
  • 등록일 :  2026-09-01
  • 조회 :  667
2026-09-01 667
7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높이시는 하느님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강론)
  • 번호 :  7
  • 등록일 :  2026-08-18
  • 조회 :  664
2026-08-18 664
6 믿음으로 사랑을 완성하는 삶 (교구청 8월 미사 강론)
  • 번호 :  6
  • 등록일 :  2026-08-06
  • 조회 :  543
2026-08-06 543
5 우리를 빚으시는 옹기장이 하느님 (성경통독 40주간 5기 수료식 및 감사미사 강론)
  • 번호 :  5
  • 등록일 :  2026-08-03
  • 조회 :  600
2026-08-03 600
4 인생이란 밭에 숨겨진 보물 (비산성당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미사 강론)
  • 번호 :  4
  • 등록일 :  2026-07-27
  • 조회 :  591
2026-07-27 591
3 믿음은 결국 선물입니다 (가르멜의 성조 엘리야 축일 미사 강론)
  • 번호 :  3
  • 등록일 :  2026-07-20
  • 조회 :  775
2026-07-20 775
2 부교구장 취임 축하식 답사
  • 번호 :  2
  • 등록일 :  2026-07-01
  • 조회 :  1018
2026-07-01 1018
1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부교구장 취임 미사 강론)
  • 번호 :  1
  • 등록일 :  2026-07-01
  • 조회 :  1064
2026-07-01 1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