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카리타스 설립 50주년 감사 미사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강론
(2025년 6월 19일,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찬미예수님,
우리나라는 카리타스 50주년을 거창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3박 4일의 여정으로 50주년을 준비했습니다.
요란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먹을 거는 없는지 모르겠지만 생각할 것은 많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왜 하는가?
과연 해야 하는 일인가?
그리고 잘하고 있는가?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하지 마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과연 우리는 예수님에게 하듯이 가장 작은 이들에게 자선이나 봉사를 베풀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떠벌리지 않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셔서 오셨습니다.
인간은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처럼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느님 나라 건설이 그분의 사명이었습니다.
“나는 다른 고을에도 하느님 나라를 전하여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마르 1,38)
그 사랑은 영순위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 31~33)
그 하느님 나라의 기초는 바로 카리타스,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에서 들은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기도요, 하느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려주는 기도입니다.
절대적으로 하느님께 속하는 ‘하느님 나라’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일입니다. 마치 ‘스스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가 보여주는 것처럼, 아무도 인간의 윤리적, 종교적 형식의 도움으로 그 성과를 이끌어 낼 수도 없고, 정치적 유형의 투쟁으로 산출해 낼 수도 없으며, 인간의 통찰적인 사고로 예견해 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보듯이 인간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모실 때 이루어집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참 아버지일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있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서로 라이벌이 아니라, 경쟁자가 아니라, 형제 자매일 때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이 아니라, 좋으신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때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뜻은 항상 우리보다 높고, 크고, 아름답고, 무엇보다 옳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하늘에서는 천사와 성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듯, 이 땅에서는 우리들에 의해서 하느님의 뜻이 실현될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해야하는 하느님 나라 상속자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에게는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구원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 주어질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날마다의 양식이 아니라, 평생의 양식을 추구하는 욕심에서 하느님 나라는 무너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죄가 용서되어 평화를 느낄 때 다가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다른 사람들이 몰라도 하느님과 나 자신은 압니다. 거짓으로 용서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한 까닭에 자유로워질 때 이루어집니다. 이웃에 대해 남은 마음의 찌꺼기는 우리를 결코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을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아무도 모르게 다가오는 악에서 보호될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려줍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의 힘과 노력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 교회는, 아닌 교회인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교회의 목표입니다.
토마섹(Tomasek) 추기경이 1985년 세계주교대의원회 임시총회 연설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 이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위해 고통을 받아야 한다. 바로 이 일이 전부다."
카리타스, 곧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합시다.
2025년 6월 19일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위원장 조 규 만 주교
한국 카리타스 설립 50주년 감사 미사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강론
(2025년 6월 19일,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찬미예수님,
우리나라는 카리타스 50주년을 거창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3박 4일의 여정으로 50주년을 준비했습니다.
요란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먹을 거는 없는지 모르겠지만 생각할 것은 많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왜 하는가?
과연 해야 하는 일인가?
그리고 잘하고 있는가?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하지 마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과연 우리는 예수님에게 하듯이 가장 작은 이들에게 자선이나 봉사를 베풀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떠벌리지 않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셔서 오셨습니다.
인간은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처럼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느님 나라 건설이 그분의 사명이었습니다.
“나는 다른 고을에도 하느님 나라를 전하여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마르 1,38)
그 사랑은 영순위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 31~33)
그 하느님 나라의 기초는 바로 카리타스,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에서 들은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기도요, 하느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려주는 기도입니다.
절대적으로 하느님께 속하는 ‘하느님 나라’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일입니다. 마치 ‘스스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가 보여주는 것처럼, 아무도 인간의 윤리적, 종교적 형식의 도움으로 그 성과를 이끌어 낼 수도 없고, 정치적 유형의 투쟁으로 산출해 낼 수도 없으며, 인간의 통찰적인 사고로 예견해 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보듯이 인간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모실 때 이루어집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참 아버지일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있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서로 라이벌이 아니라, 경쟁자가 아니라, 형제 자매일 때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이 아니라, 좋으신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때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뜻은 항상 우리보다 높고, 크고, 아름답고, 무엇보다 옳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하늘에서는 천사와 성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듯, 이 땅에서는 우리들에 의해서 하느님의 뜻이 실현될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해야하는 하느님 나라 상속자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에게는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구원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 주어질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날마다의 양식이 아니라, 평생의 양식을 추구하는 욕심에서 하느님 나라는 무너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죄가 용서되어 평화를 느낄 때 다가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다른 사람들이 몰라도 하느님과 나 자신은 압니다. 거짓으로 용서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한 까닭에 자유로워질 때 이루어집니다. 이웃에 대해 남은 마음의 찌꺼기는 우리를 결코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을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아무도 모르게 다가오는 악에서 보호될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려줍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의 힘과 노력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 교회는, 아닌 교회인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교회의 목표입니다.
토마섹(Tomasek) 추기경이 1985년 세계주교대의원회 임시총회 연설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 이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위해 고통을 받아야 한다. 바로 이 일이 전부다."
카리타스, 곧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합시다.
2025년 6월 19일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위원장 조 규 만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