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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담화] 2021년 제11회 생명 주일 담화
   2021/04/20  15:16

제11회 생명 주일 담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생명을 존중하는 입법을 촉구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모 성월의 첫 번째 주일인 5월 2일은 한국 교회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하여 정한 생명 주일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제10조 참조)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국민의 존엄과 생명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국가는 남성과 여성이 안정적으로 자녀를 낳아서 책임 있게 기르도록 물질적 토대와 사회적 제도와 법적 안전망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형법상 낙태죄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 이후, 우리 사회는 낙태 찬성과 반대 여론으로 분열과 갈등이 심해졌고 입법은 공백 상태에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현실에 깊이 우려하며, 수정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입법을 촉구하고자 합니다.

 

1. 오늘날 많은 이가 인간 생명에 대한 공격을 시민의 권리로 국가가 인정해 달라는 법적 정당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헌법 재판소는 2019년 4월 11일 형법상 낙태죄에 대하여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낙태죄를 완전히 폐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2020년 12월 31일까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조화를 이루도록 법률을 개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을 우선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천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 인간의 생명은 수정된 순간부터 시작하는 것이므로 임신 단계에 따라 보호의 정도를 달리할 수는 없습니다.

 

2. 정부는 2020년 10월 7일 낙태죄 관련 형법과 모자 보건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였는데, 임신 초기인 14주까지 사실상 아무런 제한 없이 낙태를 허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낙태가 임신 초기에 이루어지는 상황임을 고려할 때 이는 국가가 나서서 태아 살인을 정당화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문화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그마저도 헌법 재판소가 정한 개정 시한을 넘긴 채 국회에서 방치됨으로써, 지난해 말로 형법상 낙태죄 조항의 효력이 상실되는 입법 공백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 결과 의료 현장에서는 태아의 생명과 산모의 건강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3. 낙태죄를 둘러싼 논란들은 현대 문화의 특징인 윤리적 상대주의의 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법과 제도는 대부분이 민주주의의 원칙인 다수결의 원리, 절충과 합의에 근거를 둡니다. 이런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하여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긍정적인 ‘시대의 징표’로 보아야”(「백주년」, 46항) 하지만, 민주주의를 우상화하여 도덕성의 대체물이나 비도덕성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민주주의의 도덕성은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의 도덕성뿐만 아니라 동원하는 수단의 도덕성과도 긴밀히 결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나 사회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합법적인 것으로 규정할 때, 이것이야말로 가장 약하고 보호 능력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하여 폭압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생명의 복음」, 70항 참조)

 

4. 국가는 인간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방향으로 법을 제정하고 적용하고 집행해야 합니다. 나약하고 무고한 태아를 살해하는 것은 어떠한 법으로도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는 범죄입니다. 낙태를 승인하는 법은 개인의 고유한 생명 불가침권을 침해하고 공동선을 거스르므로, 진정한 법적 효력을 잃은 것입니다. 따라서 정부와 국회는 여성들이 안심하고 임신·출산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 낙태의 위험성과 부작용에 대한 다양한 상담 지원, 임부와 의사의 양심적 낙태 거부 권리 인정, 생명을 존중하는 방향으로의 사회 문화 개선과 사회 복지 지원 등을 위한 입법이나 제도 개선에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5. 향후 개정 보완된 법률이 통과되어 시행될 경우, 그 법에 협력하는 것과 관련하여 양심상의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양심을 거스르는 법을 따를 수 없습니다. 비록 국법이 허용하더라도 하느님의 법에 배치되는 행위에 명시적으로 협력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양심적으로 그러한 법들에 반대해야 할 중대하고도 명백한 의무가 있습니다. 불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거부는 도덕적 의무일 뿐 아니라 인간의 기본 권리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사나 보건 종사자들, 병원, 진료소, 요양 시설의 운영자들에게 생명을 거스르는 행위들의 상담, 준비, 실행 단계에 참여를 거부할 기회가 보장되어야 합니다”(「생명의 복음」, 74항). 관련 법령의 입법과 시행 과정에서 이러한 점들이 충분히 고려되고 반영되리라 기대하지만 그러하지 못할 경우, 양심의 법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에 대한 위협에 저항하고, 일치된 기도와 생명 교육, 적극적인 홍보와 참여를 통하여 세상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또 임신한 모든 여성이 안전하게 생명을 낳고 기를 수 있도록 동반해야 하며, 이들이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을 잉태한 임부들과 새 생명들을 축복합니다.


2021년 5월 2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문희종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