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희년 폐막미사 강론) |
2021/11/29 17:22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희년 폐막미사
2021. 11. 27(토) 계산 주교좌성당
한국 천주교회는 올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희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작년 11월 29일 대림 제1주일에 개막을 하였고 드디어 오늘 대림 제1주일 바로 전날에 폐막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탄생하신 날은 1821년 8월 21일입니다. 200주년이 되는 날이었던 지난 8월 21일에는 성모당에서 탄생 기념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이 유학 가셔서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가 되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날이었던 지난 3월 1일에도 성모당에서 ‘최양업 신부님의 탄생 기념 미사’를 봉헌한 바가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1년 동안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 희년’을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잘 지내온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희년 폐막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오늘 폐막미사를 봉헌하면서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신심을 우리 모두가 본받을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첫 사제이신 김대건 신부님을 우리나라 모든 사제들이 본받을 수 있도록 김 신부님의 전구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이번 희년의 주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당신이 천주교인이오?”입니다. 이 말은 김대건 신부님께서 체포되시어 처음 취조 받을 때 관장이 물었던 말입니다. 그래서 김 신부님이 어떻게 대답하셨겠습니까?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하고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이 내용은 김 신부님께서 감옥에 계시면서 페레올 주교님께 보낸 편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라는 말은 박해시대 때 수많은 순교자들이 심문받을 때 들었던 질문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세상 사람들이 묻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입니까?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대답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천주교인이라면 천주교인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번 희년을 보내면서 우리 신자들이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천주교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느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감염되고 고통을 받고 목숨까지 잃기도 합니다. 그 중에 또 한 가지 걱정되고 우려되는 것은 코로나 때문에 성당에 안 나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상황이 오래 되면 천주교 신자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그래서 상황이 호전이 되어도 주일 지키는 것을 소홀히 여기고 성당 안 나오는 것이 습관화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김대건 신부님과 같이 자신의 정체성과 믿음을 확고하게 가져야 할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에게서 가장 뛰어난 성덕은 신덕과 용덕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 신부님께서 남기신 편지가 스물한 통이 되는데 그 마지막 편지가 유일하게 한글로 쓰신 것으로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거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살아도 쓸데가 없다. 비록 주 은총으로 세상에 나고 주 은총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그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천이 없으면 이름을 무엇에 쓰며, 세상에 태어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배은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 남만 못 하리.”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여기에서 ‘임자’라는 말은 ‘주님’을 뜻합니다.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며 절대권을 갖고 계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 바로 ‘임자’라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의 ‘임자’임을 알았으면 그분을 배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26세의 젊은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생명을 바쳐 순교의 길을 걷도록 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김 신부님은 참으로 용기가 뛰어난 분이셨습니다. 신학생 때 벌써 두 번이나 국경을 넘어 들어오셔서 정세를 살피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1844년 12월 15일에 중국 길림성 소팔가자에서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1일에 국경을 넘어 1월 15일에 서울에 도착합니다.
김대건 부제님은 유학을 떠난 지 수년 만에 돌아왔지만 홀로 되신 어머니를 만나는 일은 뒤로 미루고, 배를 한 척 구입하고 11명의 교우들을 모집하여 4월 30일에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합니다. 폭풍우에 온갖 고생을 하고 한 달 만에 중국에 도착하여 사제품을 받고 다시 그 배를 고쳐서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레 신부님을 모시고 조선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조선에 들어올 때도 파도에 밀려 제주도까지 떠내려갔다가 다시 배를 고쳐 강경 나바위를 통하여 본토에 입국하였던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이렇게 거침없이 용감한 행동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
그렇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조선 동포들에게 하루빨리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쁜 소식을 전하고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내며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김 신부님은 1846년 5월경에 중국에 대기하고 있는 신부님들을 모셔오기 위한 해상 통로를 알아보러 연평도와 백령도를 가셨다가 돌아오는 중에 6월 초에 순위도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수차례의 심문과 고문을 받으시고 1846년 9월 16일에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셨던 것입니다.
페레올 주교님은 김 신부님의 순교 소식을 전해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김 신부님을 만나 본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열렬한 신앙심과 성실한 마음에 존경과 사랑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어떤 일도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고, 늘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조선교회에서 그를 잃은 것은 큰 슬픔이자 불행이 됐습니다.”
페레올 주교님의 말씀처럼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는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김 신부님의 그 짧은 생애는 한국천주교회의 큰 씨앗이 되었고 한국의 모든 성직자들의 큰 귀감이 되었던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한국인 첫 사제인데 그동안 한국인으로서 사제서품을 받은 사제 숫자는 작년 3월 1일자로 6601명이라고 합니다. 현재 살아계신 신부님들의 숫자가 5500여 분이 될 것입니다. 모두가 김대건 신부님의 후예들입니다. 이 분들이 참으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본받아 사제로서 잘 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은 오늘로써 폐막하지만 우리 모두는 김 신부님의 그 신덕과 용덕을 본받고 장차 김 신부님과 함께 천국복락을 누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김 신부님의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구절을 마지막으로 들어봅시다.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여 못 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서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