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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이문희 바울로 대주교 선종 2주기 추모미사 강론)
   2023/03/13  14:28

이문희 바울로 대주교 선종 2주기 추모미사

 

2023 03 12. 사순 제3주일, 범어대성당

 

이문희 바울로 대주교님 선종 2주기 추모미사를 오늘 범어대성당에서 갖게 되었습니다. 선종일이 모레입니다만, 내일부터 3박4일 동안 서울에서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가 있기 때문에 오늘 당겨서 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모레 14일 본 날에는 군위묘원에서 사무처장 신부님 주례로 추모미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오늘은 사순 제3주일입니다. 그래서 위령미사를 드릴 수 없기 때문에 주일미사를 드리되, 지향만 이 대주교님을 기리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 미사 중에, 이미 천국에서 하느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시고 계시겠지만, 이 대주교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대주교님께서 남기신 영적이며 정신적인 유산을 잘 이어갈 수 있도록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이 대주교님께서는 원래 고등학생 때 의사가 되기 위해서 이과를 선택하여 공부하셨는데 1950년대 중반에 정치에 포부를 가지고 대학은 정치학과에 들어가서 졸업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치가 당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는 갑자기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파리가톨릭대학을 졸업하시고 파리의 생술피스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으셨습니다.

의사가 되고자 했었고, 또 정치를 하고자 했었는데, 왜 사제의 길로 급선회하셨는지에 대하여 이 대주교님께서는 두 분의 성직자의 영향이 있었다고 앞산밑북카페에서 있었던 어느 강의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한 분은 김수환 추기경님이십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김수환 추기경님을 만나셨다고 하셨는데, 당시에 김 추기경님은 최덕홍 주교님의 비서로 일하시면서 계산성당의 고등부 학생회의 지도신부로도 일하셨고, 이 대주교님은 학생회의 대표를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좋은 모범이 이문희 학생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분은 최덕홍 요한 주교님이십니다. 최덕홍 요한 주교님은 우리 교구 제6대 교구장이신데, 우리 교구 출신 사제로서 최초로 주교가 되신 분이십니다. 최덕홍 주교님께서는 1949년 1월에 주교가 되셔서 교구장으로 6년 동안 사목하시다가 1954년 12월에 병환으로 선종하셨습니다.

최덕홍 주교님 계실 때 이 대주교님의 선친께서 새해가 되면 주교님께 문안을 드리러 주교관에 가곤 하셨는데, 당신을 데리고 가셨고 그때마다 최 주교님께서는 ‘신부가 되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처럼 그 말을 몇 번 듣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사제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이 대주교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어릴 때부터 일생을 살면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영향을 받느냐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4장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야곱의 우물에 물을 길으러 왔는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 여자에게 말을 건냅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그랬더니 사마리아 여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마리아 여자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오늘 복음은 한 문장으로 설명합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상종하지 않았다.’라는 말은 상대를 원수처럼 여기고 만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혹시 어쩔 수 없이 만났다면, 그릇을 함께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포함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다인인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서 이방인처럼 여기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으며, 그녀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으니 같은 두레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자 자신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그런 관습이나 사회규범이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지 않았더라면 사마리아 여인은 절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도 너무나 많은 갈등과 분열과 반목이 존재합니다. 민족 간에, 종교 간에, 세대 간에, 그리고 젠더 갈등이라고 하면서 남녀 간에도 갈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해묵은 이념 갈등은 계속되고 있고, 여와 야, 보수와 진보 간에, 최근에는 일본 강점기 시절의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 등으로 나라가 심하게 갈등을 빚고 있고 분열되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갈등은 교회 안에도 파고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얼마 전에 ‘복음은 이념이 아니다.’고 말씀하시며 진보와 보수로 갈라놓는 행태를 강하게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런 갈등과 분열은 모두 사람이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그런 갈등과 반목이 폭력을 낳고 전쟁을 낳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여당의 새로운 지도부를 당원들이 뽑았는데, 새로 선출된 당 대표가 연포탕 정당을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연포탕’이 무엇입니까? ‘연’은 연대를 말하는데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포’는 포용을 말하는데 상대방이나 경쟁했던 사람도 포용하겠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탕’은 탕평을 말합니다. 같은 진영이 아니더라도 골고루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제발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남녀유별이라든가 유다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해묵은 앙숙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는 사마리아 여인의 영혼 구원만이, 곧 우리 영혼 구원만이 중요할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이 말씀처럼 정작 목마른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삶의 목마름에 지쳐 있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찾아오시어 생명의 물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고달픈 인생 여정에서 온갖 원인과 이유로 목마릅니다. 그런데 세상이 주는 물은 우리를 다시 목마르게 합니다. 점점 더 심한 갈증만 줄 뿐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물 이외는 어떤 물도 우리의 갈증을 풀어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결국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그 사마리아 여인을 통하여 동네의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일찍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을 만났으며, 이문희 바울로 대주교님을 만났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런 소중한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의 이 길을 같이 걷고 있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함께 걸어가는 것이고, 언젠가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이문희 바울로 대주교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이문희 바울로 대주교와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