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는 어떻습니까? 참된 예언자입니까?" (성유축성미사 강론) |
2014/04/22 14:48 |
성유축성미사
2014. 04. 17. 계산주교좌성당
찬미예수님! 파스카의 성삼일이 시작되는 오늘 이 성목요일에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어제 진도 앞바다에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던 대형 여객선이 침몰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생사를 알 길이 없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이미 운명을 달리 한 사람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품 안에 안아주시기를 빕니다.
해마다 교회는 성목요일에 예수님께서 성품성사와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을 기념합니다. 특히 지금 드리는 이 성유축성미사는 성품성사를 기념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미사 중에 신부님들이 예전에 사제품을 받았을 때 하셨던 서약을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앞에서 다시 새롭게 갱신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미사에 함께 하신 모든 신부님들은 자신이 예전에 사제품을 받았던 그때를 기억하며 그때의 순수하고 열렬했던 첫 마음을 주님께서 다시 주시기를 기도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거룩한 사제 직무에 더욱 충실할 것을 다짐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교우분들은 오늘 서약 갱신하시는 신부님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드려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올해로 사제서품 금경축을 맞이하시는 허연구 모이세 신부님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1항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제는 주교에게 거룩한 서품과 파견을 받아 사제이시며 왕이신 스승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발탁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직무에 참여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직무’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느 안식일 날 나자렛의 한 회당에 가시어 이사야 예언서 두루마리를 펼쳐서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 18-19)
예수님께서 하셨던 이 일을 신부님들이 하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Homo Dei)’이며 ‘또 다른 그리스도(Alter Christus)’라고까지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사제의 신분이며 직무입니까!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을 백성들 가운데서 선택하시어 이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게 하신 것은 참으로 과분한 주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받은 사제직의 이 과분한 은총에 맞갖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교구가 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서 시노드를 개최하여 교구 쇄신과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결국 저를 비롯하여 사제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와 성사는 언제나 신자 공동체와 신앙생활의 중심이며, 사제는 ‘교회 가운데에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 맨 앞에도 서 있는 사람’(현대 사제 양성 16항 참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제 한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서 공동체가 살고 죽고 하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사제의 쇄신과 성화가 참으로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가 ‘주일미사와 고해성사에 대한 공동 사목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그 근본 이유는 지난 십 수 년 동안 주일미사 참여자와 판공성사 참여자가 지속적으로 줄고 있고 반면 날로 늘어만 가는 냉담 교우의 문제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우리 교회에 있어서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지난 2-3년 간 전국과 각 교구에서 이와 관련한 세미나와 연수와 토론을 거쳤고 그 결과들을 종합하여 주교회의가 공동사목 방안을 마련하여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올해 우리 교구 사목지침으로 ‘전례와 선교의 활성화’를 내세운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최근에 주교회의가 발표한 사목방안을 보면 주일과 주일미사의 의미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주일미사 활성화를 위하여 사제가 신자들과 함께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특히 사제의 강론에 대하여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에 보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사제들의 강론과 강론 준비에 대하여 수십 페이지에 걸쳐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교황님께서는 사제들에게 ‘강론에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라’고 하시면서 ‘이 중요한 직무와 관련한 수많은 요청들을 우리가 모른 체할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준비가 되지 않은 강론자는 영성적이지 않고 정직하지 않으며 무책임하다.’고 하시고 훌륭한 강론은 언제나 긍정적이며 언제나 희망을 주고 신자들이 ‘부정의 덫에 갇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교황님의 강론에 대한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제 자신부터 반성이 되었습니다. 신자들은 참으로 귀한 시간을 내어서 성당에 나오는데, 내가 하는 강론이 그분들에게 진정 기쁜 소식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기쁜 소식보다는 훈계와 꾸중과 비난과 비판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부정적인 비판이나 꾸중은 결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오지 못합니다. 긍정은 긍정을 낳고 부정은 부정을 낳을 뿐입니다.
그리고 교황님께서는 사제 자신이 먼저 하느님 말씀으로 감동을 받고 말씀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말씀을 일상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에 불과하다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참된 예언자입니까? 거짓 예언자입니까? 우리 스스로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대로 살아야 우리가 하는 강론이 힘이 있고 참으로 기쁜 소식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의 대다수는 평신도들입니다. 성직자는 그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본당에 부임하면 무슨 제왕처럼, 군왕처럼 백성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려고만 하는 사제가 안타깝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녁 주님만찬미사에 대부분의 본당에서는 세족례도 같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족례를 위한 세족례를 할 것이 아니라, 진정 하느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섬기는 사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당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귀한 하느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사제가 일치와 친교의 모범이 되어야지 분열의 모범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 47항에 나오는 교황님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들어봅시다.
“교회는 언제나 문이 활짝 열려있는 아버지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개방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구체적인 표시가 바로 모든 성당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닫혀있지 말아야 할 문들은 또 있습니다. 성사들의 문도 어떠한 이유로든 닫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찬례는 성사생활의 충만함이지만, 완전한 이들을 위한 보상이 아니라, 나약한 이들을 위한 영약이며 양식입니다. 우리는 자주 은총의 촉진자보다는 은총의 세리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저마다 어려움을 안고 찾아오는 모든 이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아버지의 집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