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자신들만의 기적 (프랑스 순례단 신나무골 성지 미사 강론) |
2016/10/19 22:8 |
‘선교사들이 써내려간 한국교회사’(프랑스 순례단 방문)
2016. 10. 17. 신나무골성지
우리는 오늘 자랑스러운 신앙 선배를 기념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 작은 마을 신나무골에 이만큼 반가운 손님들이 모이기는 처음일 것입니다. 180년 전 젊은 선교사들이 프랑스와 조선의 10,000km를 넘는 거리를 이어주었습니다. 그들의 전 생애가 우리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했습니다. 이처럼 우정과 존경과 감사를 다시 살리는 일은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1836년 이래 1866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20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했습니다. 2014년까지는 총 178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분들 중에 24분이 순교하셨습니다. 기해박해 때 세분, 병인박해 때 9분 그리고 한국전쟁 때 12분이 순교하셨습니다. 비록 형벌 앞에서 신앙을 증거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삶 전체가 순교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순교한 프랑스인 선교사 24인 가운데 150년 전 1866년 병인년에 순교하신 분은 아홉 분입니다. 그 당시 국내에는 12분의 프랑스 선교사가 계셨는데 그중 9분이 순교하신 것입니다.
베르뇌 주교님(르망교구), 다블뤼 주교님(아미앵 교구), 푸르티에 신부님(알비 대교구), 프티니콜라 신부님(생 디에 교구), 오메트르 신부님(앙굴렘 교구),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님(디종 대교구), 도리 신부님(뤼송 교구), 위앵 신부님(랑그르 교구), 볼리외 신부님(보르도 대교구)이 그분들입니다. 물론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신 앵베르 주교님(엑스 대교구), 모방 신부님(바이외 교구), 샤스탕 신부님(딘뉴 교구)도 우리 교회를 위해 함께 전구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 훌륭한 선교사들을 한국에 보내주신 프랑스 교회에 박수로 감사를 표합시다.
선교사란 어떤 사람입니까? 사제의 삶이 정결과 순명을 서원하는 봉헌의 삶이라 하지만 그분들은 그 젊은 나이에 자신의 부모와 고향에 생의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새로운 땅을 향해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먹는 것, 입는 것, 언어, 심지어는 시간과 달력까지 모든 개념을 다 버리고 달려온 사람들입니다.
선교사들이 이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만난 사람들이 조선 신자들입니다. 신자들도 모든 것을 다 떠나 주님만 바라본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신앙을 갖는 일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생활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조선이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가난하고, 신자들은 조선 사람 중에서도 제일 가난하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가난한 조선인 신자들과 똑같이 생활했습니다.
페롱 신부님이 다블뤼 주교님을 방문했을 때 아침이 되어서 깨어나 주교님의 내복을 보게 되었는데, 등에 헤어진 구멍이 너무 커서 잘못하면 그곳으로 머리가 나올 것 같았다고 표현했습니다. 다블뤼 주교님은 40대인데,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이미 머리는 다 빠지고 체중은 45kg밖에 안 되어 6,70대 노인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알면서 선교사들은 왜 조선을 지원했을까요? 선교사들은 조선에 와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오매트르 신부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조선인들은 좋으신 하느님을 알게 해주면 곧바로 하느님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때로는 프랑스 신자들보다 나을 때도 있습니다. 조선은 새로운 보물이고 또 많은 이익을 낼 자산입니다. 이곳에는 땅속에 묻힌 영혼이 많습니다. 일꾼들이 땅속 깊이 파고든다면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한 진주가 거룩한 빛을 내며 반짝일 것입니다.”
반면에 조선인에게 선교사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선교사들은 신자들에게 이 땅에서 주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선교사는 극동아시아의 한 구석도 주님이 잊지 않고 함께 하신다는 표시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신자들에게 그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자 정약종은 자신의 책에서 “가톨릭이 거짓이라면, 그 먼데서 거짓말을 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오겠는가? 한 사람도 아니고 수없는 선교사들이 거짓말을 하러 자신의 일생을 버렸겠는가?”라며 조선 신자들을 설득했습니다.
선교사들은 조선인 신자들에게서 간절한 신앙과 순수한 사랑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위했습니다. 다블뤼 주교님이 체포되면서 자신을 도와서 선교하던 황석두에게 피하라고 하자 그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상에서는 같이 살았는데..”하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블뤼 주교님과 함께 죽음도 같이 하였던 것입니다.
선교사와 신자들이 이렇게 마음으로 만나 새로운 세계를 형성했습니다. 그것은 박해시대 때 우리나라 곳곳에 형성된 교우촌들입니다. 신자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가족처럼 살았기 때문에 교우촌은 마치 사도시대의 공동체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신나무골도 그런 교우촌 중의 하나입니다.
신나무골은 l8l5년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산골로 숨어든 교우들의 정착촌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왔을 때 이곳에 로베르 신부님이 정착하여 본당을 시작하였던 곳입니다. 그래서 신나무골을 대구 천주교회의 첫 본당터요 요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자들이 살았으니 그 전에도 신부님들이 성사 주러 이곳에 오셨을 것입니다. 연도로 보아 샤스탕 신부님이 활동하실 때도 신자가 있었으므로 신부님도 이곳에 오셨으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소를 방문하던 선교사들은 늘 힘겨운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신자들이 성사를 받는 데 있어서 그렇게도 열심인 것을 보고 감화를 받고 동시에 힘을 얻었습니다. 신자들은 선교사에게 순교할 수 있는 자신감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헌신적인 선교사와 희생적인 신자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서로를 만들어갔던 것입니다.
물론 프랑스에서는 선교사만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부모, 친척, 고향, 고국의 사람들의 기도와 물질적 도움이 늘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곳에 자신의 고향의 도움으로 아름다운 교회를 세웠습니다.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가실성당과 왜관성당이 그 중에 하나입니다. 특히 왜관성당의 주임사제였던 신부님 중에 네 분이 한국전쟁 때 순교하셨습니다.
이곳 신나무골과 대구교구는 한국에서 순교하신 프랑스 선교사들의 발자국만 남은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발걸음은 오늘의 대구대교구를 싹트게 한 씨앗이었고, 그들의 피와 땀은 대구교구를 키워준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사와 선교사를 만났던 신자들이 해왔던 생활의 자취를 찾고 드러내는 데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한 예로 교구에서는 지난 9월 10일 ‘한티 가는 길’을 개통했습니다. 가실성당에서 신나무골을 거쳐서 한티순교성지까지 총 45.6km 되는 거리입니다. 이 길은 200여 년 전부터 한티와 신나무골 신자들이 서로의 신앙을 나누고 다지기 위해 걸었던 길입니다. 그러니까 샤스땅 신부님이나 다블뤼 주교님도 경상도 지역을 순회 전교하시면서 이 길로 오가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길 위에서 신앙의 선배들을 느낍니다.
우리 교구 주교좌 계산성당 입구에는 초대 교구장이신 드망즈 주교님이 교구 설립 25주년 은경축에 세운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분은 한국교회가 발전했을 때 초기 선교사들이 있었다고 기억해주기를 바란다면서 이 십자가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드망즈 주교의 바램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교구에서는 초대 교구장이신 드망즈 주교님의 고향인 스트라스부르그대교구와 대구본당 초대 주임이신 로베르 신부님의 고향 벨포흐 교구에 사제가 한 명씩 파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샬르트 성바오로 수녀회에서 6분, 예수성심시녀회에서는 파리공동체에 2분과 루르드 성지에 3분이 나가 봉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와 우리의 교회, 즉 가톨릭교회를 위한 우리의 봉사가 앞으로 보다 더 활발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와 한국은 그 문화가 다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보완할 수가 있습니다. 한국인은 한 번 맺은 관계를 가꾸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프랑스인들은 우리보다 현재에 베풀어진 은총을 느끼는 데 더욱 세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은총을 새로 읽어내고, 이를 간직하고 가꾸는 데 노력하는 문화를 공동으로 가꿀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국교회사에 관한 기록을 남긴 달레 신부를 비롯하여 모든 선교사들이 이야기했듯이, 이 지구상에서 조선인만큼 인류애를 실천하는 백성은 없다고 했는데, 우리 두 나라는 그런 일들을 해나가면 좋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닌 사도들이 그 많은 기적이 행해지는 것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기 힘들었었는데, 조선의 신자들은 그렇게 다른 말씀을 무엇을 보고 믿었을까요?”
그것은 선교사와 신자들의 소통이었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자신들만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그렇게 아름다운 신앙 이야기를 썼던 것입니다.
그들의 글은 조선을 울렸고, 프랑스를 감동시켰으며, 전 세계 교회의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인을 위해 남겼던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증거를 다시 확인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