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 저를 용서하소서 (주님 수난 예식 강론) |
2024/04/02 9:31 |
주님 수난 예식
2024. 03. 29. 성모당
오늘 우리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을 맞이하여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이어서 ‘주님 수난 예식’을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일 년 중에 미사 없는 날이 오늘과 내일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이고, 내일은 무덤에 계시는 날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내일 밤에야 ‘파스카 성야’의 불을 밝히며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4개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주요 행적과 가르침을 기록한 책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가장 상세하게 기록한 부분이 수난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의미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지난 주일이 ‘주님 수난 성지주일’이었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에는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의 수난기를 봉독하고, 오늘 성금요일에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수난기를 봉독하고 있습니다.
오늘 조금 전에 들은 ‘요한이 전한 예수님의 수난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 어느 동산에 가 계셨는데, 유다를 앞세우고 병사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들이닥치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대사제 한나스에게 데려가서 신문을 하였고, 다시 카야파 대사제에게 데리고 가서 신문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사형시킬 권한이 없기 때문에 다시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에게 끌고 갔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몇 가지 신문하였지만, 사형시킬 만한 죄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그렇게 하라고 그들에게 넘겨주고 맙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라는 곳에 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수난기를 들으면서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무거운지 알 것 같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돌아설 수 있는지, 3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로 동고동락했던 유다가 어떻게 스승을 배반할 수 있는지! 그런데 사실 이것이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날 광복절 특사처럼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여 당시 빌라도 총독이 ‘죄수 하나를 풀어주려고 하는데 누구를 풀어주면 좋겠느냐’고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강도짓를 저질었던 ‘바라빠’라는 사람을 선택하였습니다. 선동정치에 놀아났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는 일입니다. 진리와 진실보다는 자신에게 미칠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고, 그리하여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어떤 취향이나 선입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재단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일은 개인과 개인 간에도 일어나지만, 단체와 단체, 국가와 국가 간에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분쟁이 생기고 파업이 생기고 고소 고발이 생기고 국가 간에는 전쟁이 터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일들의 배경에는 정의나 진리보다는 개인과 집단의 이익이 깔려있습니다. 무엇이 참이냐, 거짓이냐보다는 무엇이 이익이고 무엇이 손해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분쟁의 피해는 죄 없는 제3자나 약자가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어쩌면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 조금 전에 십자가의 길 기도를 다 같이 바쳤습니다. 오늘은 생태적 회개를 위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습니다. 묵상하는 내용이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고 참으로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문제는 실천입니다. 정부나 단체가 좋은 정책을 내놓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저는 단순한 삶이 어느 정도 실천적인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수난 예식을 시작하기 위해 입당할 때 성가도 부르지 않고 침묵 중에 입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대 앞에 도착하여서는 무릎을 꿇고 잠시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제대 앞에서 기도하면서 ‘주님, 저를 용서하소서. 저희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그리고 전쟁을 멎게 하소서.’하고 기도드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까지 사랑을 가르쳐주셨고, 끝까지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만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억울하게 돌아가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억울하게, 그리고 그렇게 고통스럽게만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가시고자 했던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수난을 고통과 굴욕의 사건이 아니라 영광의 사건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긴 시간을 보내면서 당신이 이제 영광을 받을 시간이 다가옴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 ‘영광의 시간’이라는 것은 바로 당신 ‘죽음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상징입니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나 중요한 일을 할 때는 늘 몸에 십자가를 긋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1코린토 1,18.22-23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는 조금 전에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며, “예수 그리스도님,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의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하고 기도드렸습니다. 이 기도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성금요일입니다. 거룩한 금요일이라는 말입니다. 영어권에서는 오늘을 ‘Good Friday’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 정확한 연유를 잘 모르지만 아마도 성금요일에 예수님께서 당신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그렇게 부르기 시작하였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금요일에 주님 수난 예식을 하면서 당신 수난과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