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ME 봉사자 연수 파견미사 강론) |
2022/12/09 11:12 |
ME 봉사자 연수 파견미사
2022. 12. 04. 대림 제2주일, 한티성지
어제 토요일 새벽에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축구 대표 팀이 포르투갈을 이기고 16강에 올라서 온 국민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날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우리나라 대표 팀의 승리가 새로운 기쁨과 활력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 16강 상대팀이 세계 1위인 브라질이지만, 우리가 못 이긴다는 법은 없습니다. 이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간절함과 열정을 가지고 한다면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삶도 그런 간절함과 열정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구 ME 봉사자 부부들이 어제부터 이 피정의 집에 들어와서 새로운 다짐을 하고 새로운 봉사를 위한 준비모임을 가졌는데, 월드컵 대표 팀과 같은 그런 간절함과 열정과 투혼을 다시 불사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제 저녁에 있었던 간담회에서 보니까 여러분들에게서 서로를 사랑하고 하나가 되고자 하는 눈빛이 가득한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며 인권주일입니다. 대림절의 인물은 세례자 요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그분의 길을 마련하기 위해 미리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입니다.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는 이 요한을 두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표현합니다. 그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즉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오늘 복음(마태 3,1-12)은 들려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내뱉은 제일성이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제일성도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의 설교의 핵심, 목표, 주제는 하늘나라, 하느님 나라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설교의 핵심이고 그 하느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 회개라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를 했다는 표시로 요르단 강으로 와서 세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로 오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8-9)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 말씀은 회개를 말로만이 아니라, 그리고 마음가짐을 새로 갖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행동과 삶이 바뀌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부로서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고 살고 있는가?’하고 솔직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상대방을 탓하기 전에 자신이 고치고 개선해야 할 점이 없는가?’ 이런 방향으로 성찰을 해야지 상대방의 부족함이나 단점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구는 ‘복음의 기쁨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10년 장기 사목 계획에 따라 지난 2년 동안은 ‘하느님 말씀을 따라’ 살았고, 앞으로 2년 동안은 ‘친교로 하나 되어’라는 주제로 살아 갈 것입니다.
여기서 ‘친교’라는 것은 단순히 친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보편교회가 세계주교시노드를 하고 있는데, 이번 시노드 주제가 시노달리타스입니다. 시노드나 시노달리타스나 그 뜻은 ‘함께 길을 가는 여정’을 말합니다.
부부가 바로 함께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모두도 함께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만나고 경청하고 참여하며 주어진 사명을 함께 수행하는 것입니다.
친교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양보하고 자기 것을 내어놓고 들어주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11)라고 오늘 복음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9)
이 말은 “너희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신 이스라엘 백성이다, 즉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다’고 자랑할 것 없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예전에 회식 자리에서 건배하면서 ‘우리가 다리가!’라는 말이 한 때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리’라는 말은 경상도 북부지방 사투리인데 ‘다리가!’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의미이지만 약간의 배타적인 의미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나와 우리만 소중하고 다른 사람은 멀리하는 경향 때문에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고 이 사회에 수많은 갈등과 혐오까지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회개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회개도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됩니다.
얼마 전 미국에 중간선거가 있었는데, 어느 유권자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미국 사람들 중에는 사실과 진실과 정직함과는 상관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1/3이 된다. 그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늘은 한국천주교회가 정한 ‘인권주일’이고 이번 주간이 ‘사회교리주간’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고 존엄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어떠한 사람도 그의 존엄성을 침해해서도 안 되며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가 보장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참 평화와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으로 읽은 시편 72장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저 달이 다할 때까지 정의와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