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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주님 만찬 저녁미사 강론)
   2023/04/07  17:55

주님 만찬 저녁미사

 

2023. 04. 06. 대신학교

 

지금 드리는 ‘주님 만찬 저녁미사’부터 ‘파스카 성삼일’이 시작됩니다.

소형섭 신부님께서 이 달 ‘빛’ 잡지에 ‘파스카 성삼일에 대한 몇 가지 궁금증’에 대하여 설명을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성목요일부터 부활대축일까지 계산하면 4일인데, 왜 성삼일이라고 했을까 하는 궁금증에 대하여도 설명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이 하루를 세는 방법이 우리처럼 자정부터 자정까지가 아니라 일몰부터 일몰까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목요일 저녁은 이미 금요일인 것입니다.

한 30년 전에 제가 예루살렘에 얼마 동안 머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다른 신부님 두 분과 함께 예루살렘 근교의 어느 작은 도시로 여행을 가서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몇 군데 둘러보고 점심을 먹은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위해 시외버스정류장에 갔더니 출발하는 차가 없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해가 져야 떠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이 바로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합실에서 몇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드디어 해가 지자 사이렌 소리가 나더니 버스 기사들이 버스에 올라 시동을 걸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아마 그럴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안식일, 즉 주님의 날을 철저히 지키는 그 정신은 본받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오늘 주님 만찬 저녁미사를 드리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깊이 묵상하고 새길 수 있는 성삼일이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저녁은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을 기념합니다.

오늘 제2독서를 보면 바오로 사도께서 그날 만찬 때 있었던 상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은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3-25)

사실 바오로 사도는 그 만찬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하여 이렇게 자세히 기록하는 것을 보면 바오로 사도 자신의 말처럼 주님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6)

 

오늘 복음(요한 13,1-15)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장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강론 후에 통상적으로 ‘발 씻김 예식’을 하는데, 2년 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생략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두 개의 대야가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대야이고, 다른 하나는 빌라도 총독의 대야입니다. 예수님의 대야는 사랑과 봉사와 구원의 가르침을 보여주는 대야입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대야는 죄 없는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하고는 그것에 대해 본인은 책임이 없다는 비겁함의 대야이며 의인의 피를 흘리게 만든 범죄의 대야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갑자기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습니다.

첫 번째로 발 씻김을 받은 제자가 누구인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갑작스럽고 상상할 수도 없는 예수님의 행동에 모두가 너무도 놀라고 망연자실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드디어 베드로 차례가 되었을 때 베드로가 침묵을 깹니다.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옛말에 ‘제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스승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세족례를 할 것이고 많은 성당에서 오늘 세족례를 하리라 생각됩니다. 발 씻김 예식이 오늘 예절에 있기 때문에 하느냐,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느냐, 혹은 참으로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 하느냐 하는 것은 분명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주신 다음, 식탁에 앉으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2.14-15)

예수님께서 ‘서로 발을 씻어주어라’고 하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며, 겸손하게 서로를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의무사항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의무인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발 씻김 예식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깊이 묵상하고 실생활에서 잘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만이 아니라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우리 구원의 이 핵심적인 사건과 신비를 체험하고 묵상하면서 거룩한 파스카 성삼일을 지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