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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길 위의 참된 목자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시복을 위한 기원미사 강론)
   2021/03/02  11:57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시복을 위한 기원미사

 

2021. 03. 01. 성모당

 

오늘은 사순 제2주간 월요일이며 3.1만세운동 기념일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사제가 되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서 태어나신 날로서 오늘로 200주년이 되기에 한국천주교 주교회의가 정한 대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시복을 위한 기원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첫 번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도 같은 해 8월 21일에 태어나셨습니다. 두 분 다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는데,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순교를 하시고 성인이 되셨기 때문에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희년을 지낼 수 있도록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교황님께 희년 선포를 요청하였고 교황님께서 허락하셔서 올해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1821년 3월 1일에 충청남도 청양군 다락골에서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1805-1839년)과 모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 1801-1840년) 사이에 여섯 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836년에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은 세 소년 중에 가장 먼저 2월 6일 한양의 모방(Maubant) 신부님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3월 14일에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7월 11일에는 김대건 안드레아가 합류하였습니다. 이 세 소년들은 그 해 12월 3일에 조선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6월 7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였으니 6개월이 걸렸던 것입니다. 세 소년은 그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 밑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최방제 신학생이 그해 11월 27일 열병으로 선종하게 됩니다.

1839년 조선에서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있었을 때, 마카오에도 민란이 생겨 파리외방전교회의 극동대표부의 몇 명의 신부님들이 조선의 이 두 신학생을 데리고 필리핀 마닐라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마닐라에서 조금 떨어진 롤롬보이에 있는 도미니코회의 농장으로 이전하여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그해 9월 12일에 최양업 신학생의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서울 포도청에서 옥사하였고, 세 명의 선교사(앵베르 범주교님, 모방 신부님, 샤스탕 신부님) 또한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김대건 신학생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도 그 해 9월 26일에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였던 것입니다.

최양업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는 남편의 옥사를 지켜보다가 어린 아이들에 대한 모성애로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여 풀려났지만 첫째 아들을 신부 만들기 위해 국경 너머 중국으로 보냈다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되어 마침내 순교하였습니다.

이 소식은 한참 뒤에야 두 신학생에게 전해졌습니다. 두 신학생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선교사들과 두 신학생은 11월 말쯤 마카오가 안전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마닐라를 떠나 마카오 본부로 귀환하여 공부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 후 1842년에 두 신학생은 각기 다른 배를 타고 중국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드디어 중국 백가점 교우촌을 거쳐 만주 길림성의 교우촌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도착하여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1844년 12월 15일에 두 사람은 페레올 고 주교님으로부터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2019년 10월에 중국 동북삼성에 있는 안중근 토마스 의사 유적지를 교구 평신도 임원들과 함께 순례하는 길에 장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소팔가자 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미사를 드렸는데 참으로 감개무량하였습니다.

 

당시 최양업 부제와 김대건 부제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조선으로 입국하는 길을 개척하는 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 그 길을 개척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김대건 부제가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을 하였고, 얼마 후 조선의 신자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서해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건너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페레올 주교님은 1845년 8월 17일에 중국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를 사제로 서품하였습니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님은 부서진 배를 고쳐서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 등을 모시고 다시 서해를 건너오다 풍랑을 만나 제주도까지 떠내려갔다가 그 해 10월에 강경 나바위로 해서 조선에 입국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 다음 해인 1846년 5월 12일에 중국에 남아있는 선교사들을 다시 모셔오기 위한 항로를 살펴보기 위해 황해도 순위도에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고, 그 해 9월 16일에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최양업 부제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중국에 남아있던 최양업 부제는 메스트로 신부와 함께 페레올 주교님의 지시를 기다리면서 여러 번 입국을 시도하지만 실패하였습니다.

그 대신에 최양업 부제는 현석문(玄錫文, 가롤로)와 이재의(李在誼, 토마스)가 수집하고 페레올 주교님이 프랑스어로 정리한 『기해-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인편으로 전해 받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수록된 82위의 조선 순교자 자료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를 거쳐 교황청으로 보내졌으며, 1857년에 순교자 82위 모두가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습니다. 82위 중에서 3위가 보류되고 79위 순교자가 1925년 7월 5일에 로마에서 시복되었고, 다시 1984년 5월 6일 한국의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와 함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되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최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15일에 중국 상해에서 예수회 마레스카 주교님으로부터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해 12월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페레올 고 주교님과 다불뤼 신부님, 그리고 1852년에 입국한 메스트로 신부님 등이 계셨지만 그들은 모두 외국인들이라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최양업신부님이 좀 더 자유롭게 충청도와 경상도와 전라도의 교우촌들을 죄다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최 신부님이 입국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았던 1851년 10월 15일에 쓴 여덟 번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조선의 5도(충청도, 경상 좌·우도, 전라 좌·우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 곳곳에 있습니다. …… 제가 담당하는 공소 곧 교우촌은 자그마치 127곳이나 되고, 그러한 마을에서 세례명을 가진 이들을 다 합하면, 5,936명이나 됩니다. 한 공소에 고해자가 마흔 명 내지 쉰 명이 있어도 그들 모두에게 하루 안에 고해성사를 다 집전해 주어야 합니다. 반면 고해자가 두 명이나 세 명밖에 없는 공소에서도 다음날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성체를 배령하게 해 주어야 하기에 하루를 묵어야 합니다. 저는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해야 하고, 공소 순방이 끝나면 한밤중에 모든 일을 마치고 새벽녘 동이 트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여덟 번째 서간, 1851년 10월 15일).

 

최양업신부님은 1861년 6월 15일에 그의 나이 41에 문경세재 근방에서 선종하기까지 전국을 다니시면서, 그것도 숨어서 다니시면서 얼마나 험한 길을 많이도 걸었겠습니까! 그리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교우촌들을 방문하였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성사를 주었겠습니까!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최 신부님께서 한티나 신나무골 교우촌에도 오셨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신부님은 과로에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문경세재 근방 진안리에서 선종하셨으니, 올해로 선종 160주년이 됩니다.

그분의 장례식은 베르뇌 장 주교님의 집전으로 여러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충북 제천에 있는 배론 신학교에서 거행되었습니다.

베르뇌 주교님은 장례미사 강론에서 말씀하시기를, “최 신부님은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블뤼 부주교님도 “최 신부님의 뛰어난 덕행, 지칠 줄 모르는 열성, 두드러진 재능과 재질, 무슨 일이든지 해내는 능력 등으로 미루어 현재로서는 그의 자리를 메울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지난 수년 동안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서 복자품에 오를 수 있도록 많은 기도와 노력을 하였지만 아직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1984년에 성인이 되셨고, 모친 이성례 마리아는 지난 2014년 8월 16일에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서 조선시대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님은 피의 순교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고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최양업 신부님은 ‘길 위의 참된 목자’였고 ‘땀의 증거자’, ‘땀의 순교자’였기 때문에 언젠가 시복이 되고 시성이 되리라 믿고 열심히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