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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8월 11일 목요일

[(백)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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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 성녀는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적 생활에 감명을 받은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클라라 수도회를 세웠다. 수도 생활에 대한 집안의 반대가 심하였으나, 오히려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 클라라의 뒤를 따라 수도자가 되었다. 클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철저하게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다. 1253년 선종한 그를 2년 뒤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이 슬기롭고 지혜로운 동정녀는 등불을 밝혀 들고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갔네.

<또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얼마나 아름다운가! 주님의 화관, 영원한 동정의 화관을 받았네.
하느님, 복된 클라라를 자비로이 이끄시어 가난을 사랑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가난의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옵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이스라엘이 유배를 당하여 끌려갈 것을 미리 보여 주는 예표로 삼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시며 빚을 탕감받은 악한 종의 비유를 드시고는,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고 하신다(복음).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2,1-12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3 그러니 너 사람의 아들아, 유배 짐을 꾸려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네가 사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유배를 가거라. 행여 자기들이 반항의 집안임을 그들이 깨달을지도 모른다. 4 너는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떠나듯이 떠나라.
5 그들이 보는 앞에서 벽을 뚫고 나가라. 6 너는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가는데,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마라.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삼았다.”
7 나는 명령을 받은 대로 하였다.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손으로 벽을 뚫고,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갔다.
8 이튿날 아침에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9 “사람의 아들아, 저 반항의 집안인 이스라엘 집안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너에게 묻지 않았느냐? 10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신탁은 예루살렘에 있는 수장과 그 안에 있는 온 이스라엘 집안에 관한 것이다.’
11 너는 또 말하여라. ‘나는 여러분을 위한 예표입니다. 내가 한 것과 똑같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갈 것입니다.’ 12 그들 가운데에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시편 78(77),56-57.58-59.61-62(◎ 7ㄴ 참조)
◎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 그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시험하고, 그분께 반항하며, 그분의 법을 지키지 않았네. 그들의 조상들처럼 등 돌려 배신하고, 뒤틀린 활처럼 어긋나 버렸네. ◎
○ 산당을 지어 그분의 화를 돋우고, 우상을 세워 그분을 진노케 하였네. 하느님은 들으시고 격노하시어,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셨네. ◎
○ 당신의 힘을 적에게 사로잡히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적의 손에 내주셨네. 당신 백성을 칼에 넘기시고, 당신 소유에게 격노하셨네. ◎
시편 119(118),135
◎ 알렐루야.
○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시고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쳐 주소서.
◎ 알렐루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필리 3,8-14)와 복음(마태 19,27-29)을 봉독할 수 있다.>
주님, 복된 동정녀 클라라를 기리는 저희가 놀라우신 주님을 찬양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님 앞에 엎드려 청하오니 그의 공로를 기꺼워하셨듯이 저희가 바치는 제사도 기쁘게 받아 주소서. 우리 주 …….
마태 25,6 참조
보라, 신랑이 오신다. 주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가라.

<또는>

시편 27(26),4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 하느님, 천상 선물을 나누어 받고 비오니 저희가 복된 클라라를 본받아 예수님의 수난을 깊이 새기며 오로지 주님의 뜻만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주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여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최민순 역, 시편 129[130],3).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잊으십니다. 반면 우리는 형제들의 죄를 용서하지만 잊지는 않습니다. 용서는 신자의 삶에서 가장 중심 기둥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한 말씀인 마태오 복음 18장은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회개의 명령으로 시작하여 오늘 복음처럼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정점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 두 번 나오는데, 용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서로 약간 다릅니다. 마태오 복음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6,12)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기 앞서 형제들에 대한 우리의 용서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곧 용서의 구체적인 실천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또 마태오 복음은 주님의 기도 다음에 곧바로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6,14-15). 마치 주님의 기도의 핵심이 형제들에 대한 용서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반면 루카 복음은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11,4)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용서의 범위가 ‘모든’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또한 현재 시제를 통하여 용서의 행위가 순간순간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용서를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본능에 맞서 언제나 용서를 실천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용서하면 할수록 얻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점점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 됩니다. 용서가, 용서받는 이가 아니라 용서하는 나를 위한 것이 됩니다. 용서를 통하여 우리는 점점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됩니다. (정용진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