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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난한 이들의 참된 친구들 (미션)
   2014/06/04  0:4
 정일우.jpg


주: 담소중인 정일우 신부님과 신원식 신부 (예수회 관구장)     


                                가난한 이들의 참된 친구들

 

  십자가를 안테나로!

  가난한 이들의 대부인 예수회 정일우신부님의 선종소식을 인터넷에서 보다가 선종하신 정신부님과 나란히 앉아 담소를 하고 있는 저와 경북대 공대 동기였던 신원식신부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대학시절 가톨릭 신자였지만 빨마(경북대 가톨릭반의 별칭) 활동보다는 학생회관 옥상에 있는 아마추어무선반(HL0O) 활동을 주로 했던 저와는 달리 신신부는 빨마 활동에 매사 적극적이었고 또 그의 오르간 연주 솜씨는 일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회에 입회하고 또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는 소식을 들은 지가 약 30년이 지났는데 이렇게 신문에서 중년이 된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도 선종하신 선배 정일우신부님 못지 않게 가난한 이들의 참된 친구로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한국인으로 귀화하여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다가 선종하신 정신부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면서 신문에 난 그의 선종소식과 신원식신부의 강론 그리고 예수회 회원들의 감동적인 선교를 그린 영화 '미션'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가브리엘통신

 

                                     <그가 딸기쨈을 판 이유는? >

 

  '파란눈의 신부'로 유명한 빈민운동의 대부 정일우 신부가 2일 오후 7시 40분 지병으로 선종했다. 향년 79세.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정 신부는 1960년 9월 예수회 신학생 신분으로 처음 한국땅을 밟았다. 1963년 실습이 끝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4년 뒤 고등학교 은사인 고(故) 바실 프라이스 신부(2004년 선종)의 영향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다. 서강대 설립 주역인 프라이스 신부는 1966년 국내 최초로 노동문제 연구소를 열어 34년 동안 노동자들에게 노동법과 노조 활동, 단체교섭 방법 등을 가르친 국내 노동 운동의 선구자다. 정 신부는 프라이스 신부와 함께 서강대에서 강의하던 1972년 학생들이 유신반대 운동을 하다 당시 중앙정보부에 잡혀 들어간 것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에 눈을 떴다. 이때 정 신부는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8일 동안 단식하기도 했다.

 

 

  이후 개발 논리에 밀려 비참하게 살아가는 빈민들의 삶을 접한 뒤 청계천과 양평동 판자촌 빈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빈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빈민들이 스스로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의식 교육을 하고 판자촌 철거 반대 시위를 주도하면서 빈민의 '정신적 아버지'로 자리잡았다.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 곳곳에서 철거작업이 진행되자 상계동과 목동 등지에서 철거민을 도왔고 이들의 자립을 위해 '복음자리 딸기잼'을 만들어 팔았다. 정 신부 곁에는 고(故) 제정구 전 의원이 든든한 동지로 늘 함께했다. 이들은 1986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는 생전에 "판자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개발 논리에 밀려 정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그들을 외면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1998년 귀화한 뒤 충북 괴산에 농촌 청년 자립을 돕기 위한 누룩공동체를 만들어 농촌 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2004년 70세 생일을 앞두고 단식 도중 쓰러졌다가 이듬해 중풍으로 다시 쓰러진 뒤 모든 활동을 접고 요양해 왔다. 정 신부가 속한 예수회 한국관구는 "평생을 통해 이웃을 위한 봉사와 사랑을 실천하시고 하느님의 품에 안긴 정일우 신부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를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빈소는 성모병원 영안실이며, 장례미사는 4일 오전 8시 30분 예수회센터 3층 성당에서 열린다.   (출처: 조선닷컴)


 

                                 1시간 동안 흘린 눈물 / 신원식 신부

 

  며칠전에 전화가 왔습니다. 연락이 끊긴지 거의 10년이 다 되었던 분이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너무 반가왔습니다. 일본에 계신분인데 한국에 오시면 식사 대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화를 끊었는데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한 시간 정도 줄줄 흘렀습니다. 저 자신도 당황스러웠습니다. 눈물의 의미가 무엇일까? 처음에 생각나는 것은 "나도 갱년기가 시작되었는가보다."...

 

  그 눈물이 왜 나는가?

  그분이 어떤 분인가?

 

  저는 일본에서 공부하던 신학교 시절에 잠시 필리핀에 갔었습니다. 필리핀에 체류하는 중간에 시골에 2, 3 일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나무 위에 집을 짓고 가난하게 사는 동네였습니다. 성당이 없는 공소였는데 새로 성당을 짓기 위해 기둥을 세워 놓고 돈이 없어서 더이상 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왔다니까 일본사람인줄 알고 도와달라고 하였습니다. 일본에 가서 모금을 해 주기를 부탁하였습니다.

 

  그 뒤 일본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성당건립이 한 두푼 드는 것도 아니지만 필리핀의 가난한 이들과 약속을 하였기에 지점장들, 상사 주재원들에게 일일히 찾아 다니며 모금을 하려고 하였지만 돈 많은 사람중에 아무도 도와 주는 분이 없었습니다. 저는 당시 한인 성당에서 일본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제게 전화 한 분이 우연히 지나가다 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역시 다릅니다. 이분은 남편이 돌아가시자 일본에 와서 야간에 주방일을 하시며 힘겹게 살아가고 계신분이었습니다.이 분이 지나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술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호스테스들에게 이야기를 해서 거금을 모아왔습니다. 소문에 소문을 듣고 많은 분들이 모금에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돈을 낸 사람들은 밑바닥에서 일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결국은 필리핀의 시골에 성당을 멋지게 지었습니다. 전혀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도와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니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엔 전혀 불가능한 것 같으나 결국은 다 되었습니다.

 

  그분이 일본의 저희 수도원피정집에서 피정을 하였습니다. 다른 신부님이 지도 해 주셨는데 지도신부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피정이 끝나고 커다란 위로를 받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자매님은 아들 3 명이 속 썩이고 아주 복잡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피정이 끝나고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옆 사람에게 조금 스쳤는데 젊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귀싸대기를 때렸습니다. 일반적으로 감정을 억압하는 냉철한 일본 사람이 이런 행동을 보이자 순간적으로 전철안은 얼어붙은 분위기가 되었습니다.뺨을 맞았는데 조금도 무섭다거나 챙피하다거나 당황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피정이 끝나고 그 기쁨과 평화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놀랐습니다. 더 놀란 것은 그 청년이었습니다. 맞은 사람이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무서워하는 것도 아니고 연민의 마음으로 부드럽게 너무나 편안하게 바라 보는 것입니다. 당황한 그 청년이 다음 역에 서자 마자 총알 같이 도망가 버렸습니다...>

 

  제가 사제로 살아가면서 그분의 모습은 모범이 되고 힘이 됩니다. 눈물의 의미는 너무나 반갑고, 내가 그런 분을 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 미안해서인 것 같았습니다. 그분에게 연락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죄송하고 미안하였습니다. 저희들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고 완덕으로 나아가는데 구체적인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구체적인 힘이 되어 줍니다. 지금은 나이가 70세가 다 되신 분으로 저에게는 어머니뻘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내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분이었던가! 그 분을 생각하면 굉장히 위로를 받습니다. 2, 3 분 통화해서 사제인 저를 1시간 동안 울게 만드는 것, 그건 대단한 능력입니다!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은 신부를 잘 찾아오지 않습니다.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발가 벗기어 두드려 맞고 아버지를 원수처럼 여기던 사람들이 아버지를 안아주고 화해를 합니다. 온 집안이 죽이니 살리니, 친가쪽으로 외가쪽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는데 한 사람이 영적인 체험을 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자 온 집안이 변화 되었습니다. 서로 싸우던 이모와 삼촌이 화해하고 이것이 연쇄반응처럼 일어났습니다. 모든 경우에 시작은 똑같습니다. 문제는 관계에서 일어나는데, 내 안에 평화가 주어지면 한 사람이 진짜 평화를 체험하면 그 평화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됩니다...

                                  (출처: 2005년도 신신부님의 강론 중에서)

 

 

                       <영화 '미션'>

 

  때는 1750년대, 용병이자 노예상인 멘도사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의 경계선에 위치한 산 미겔 선교회 근처에서 원주민들을 잡아 팔며 생활한다. 그러나 그럭저럭 평탄했던 그의 삶은 동생인 펠리페가 자신의 연인 카를로타와 사랑에 빠지면서 풍비박산 나고 만다. 동생과 연인의 배신에 이성을 잃은 멘도사는 결투 끝에 동생을 죽이고,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선교원 안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한다. 멘도사를 다시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은 폭포 위 고지대의 원주민들과 함께 새 선교회를 세우고 있는 신부 가브리엘이었다. 죄악을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참회의 방법도 직접 선택하라는 가브리엘의 말에, 멘도사는 무거운 갑옷더미를 끌면서 폭포 위까지 기어 올라간다. 고지대의 원주민들은 천적인 멘도사의 출현에 동요하지만, 곧 그의 몸에 달린 갑옷더미를 끊어내 주고 따뜻하게 맞아준다. 이 일을 계기로 멘도사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예수회 수도사로 거듭난다. 하지만 가브리엘과 멘도사의 선교회 설립은 곧 정치적 문제에 맞닥뜨리고 만다. 한때 스페인 측 영토였던 폭포 위 밀림이 양국간 협약에 의해 포르투갈에 넘어가면서, 아직 노예 제도가 합법인 포르투갈 측이 자유롭게 노예사냥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나 원주민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예수회 선교회에 큰 반감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에서 추기경이 찾아온다. 추기경은 여러 선교회를 둘러보며 무한한 감동을 받지만, 유럽의 안정과 교황권 유지를 위해 가브리엘이 세운 산 카를로스 선교회 폐쇄를 명령한다. 그러나 과라니족과 가브리엘, 멘도사는 그의 명령에 불복해 이주민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시작한다. 가브리엘은 무력 사용을 반대하며 평화적인 시위를 원한 반면, 멘도사는 무력으로라도 선교회를 지키겠다며 과라니족에게 군사 교육을 시키기 시작한다. 마침내 쳐들어온 스페인과 포르투갈 연합군을 맞아 멘도사와 과라니족은 격전을 치르지만 결국 처참하게 패하고, 십자가를 들고 행진하던 가브리엘 역시 총탄에 맞아 숨진다.

 

                                       <말씀에 접지하기; 필립 3, 10>


                       (마르코니 문화영성 연구소 ; http://cafe.daum.net/ds0y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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