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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 성인·복자 탄생... 공산 정권에 희생된 폴란드 사제 포함
   2024/02/05  15:23


왼쪽부터 순교자 미하우 라파츠 신부, 가경자 세바스티안 길리 비베스, 복녀 마리아 레오니아 파라디스, 가경자 치릴로 요한 조라비안, 가경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막달레나 수녀, 가경자 지안프랑코 마리아 치티  

 

교회의 새 성인과 새 복자가 탄생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월 24일 성가정 작은 수녀회 창립자 복녀 마리아 레오니아 파라디스 수녀의 전구로 인한 기적을 승인했다. 아울러 ‘신앙에 대한 증오’로 피살된 미하우 라파츠 신부를 순교자로 인정, 복자품에 올리는 교령을 승인했다. 또한 카푸친 작은형제회 수도자 두 명, 스페인 사제 한 명 그리고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기도에 헌신한 수녀 한 명의 ‘영웅적 덕행’을 인정하고 가경자로 공포하는 교령을 승인했다.


Tiziana Campisi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캐나다에 살았던 성가정 작은 수녀회 설립자 복녀 마리아 레오니아 파라디스가 성인품에 오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월 24일 교황청 시성부 장관 마르첼로 세메라로 추기경의 예방을 받고 수녀에게 청한 전구기도에 따른 기적을 승인하는 교령과 1946년 5월 12일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신앙에 대한 증오’(in odium fidei)로 순교한 미하우 라파츠 신부를 복자품에 올리는 교령을 공포하도록 승인했다. 또한 아실리센의 명의 주교 치릴로 요한 조라비안, 카푸친 수도자 지안프랑코 마리아 치티, 아우구스티노 수녀회 창립자 세바스티안 길리 비베스 신부, 교회의 딸 수녀회 소속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막달레나 수녀 등 ‘하느님의 종’ 4명의 ‘영웅적 덕행’을 인정하고 가경자로 공포하는 교령을 승인했다.

 

사제들을 뒷바라지하는 데 헌신한 여성
1984년 9월 11일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된 마리아 레오니아 파라디스 수녀는 기적 심사가 승인돼 성인품에 오른다. 1986년 퀘벡의 생장쉬르리슐리외에서 태어나 “다발성 장기부전과 뇌병증을 동반한 장기간의 주산기 질식”을 진단받은 신생아는 마리아 레오니아 수녀에게 청한 전구기도의 결과 기적적으로 치유됐다. 마리아 레오니아 수녀는 1840년 5월 12일 캐나다 라카디에서 태어나 13세 때 ‘성십자가의 사제’ 공동체의 가사 도우미 봉사와 젊은이 교육에 헌신하는 마리아회 성십자가 수녀회에 입회했다. 캐나다의 여러 공동체에 파견됐다가 1862년 미국으로 파견된 그녀는 7년 후 수녀회 인디애나관구의 수도자들이 프랑스 소재 수녀회 모원에서 갈라져 나가는 상황을 지켜봤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 합류했다. 카밀루스 르페브르 신부의 초청으로 캐나다로 돌아온 그녀는 성 요셉 대학에서 일할 수 있는 젊은 여성 수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몬트리올대교구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학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했다. 1880년 5월 31일, 수도 공동체와 대학, 신학교에서 봉사하는 것을 구체적인 목표로 삼은 “성가정의 작은 자매” 수녀회를 설립했다. 마리아 레오니아 수녀가 사제들을 물질적, 영적으로 도울 것을 권고한 새로운 공동체도 문을 열었다. 이에 따라 수도원과 신학교에서는 투명성과 평화, 질서와 신중함으로 이뤄진 나자렛 성가정에 걸맞은 분위기가 조성됐다. 마리아 레오니아 수녀는 1912년 5월 3일 셔브룩에서 72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그녀가 설립한 수녀원은 캐나다를 비롯해 온두라스, 이탈리아, 미국에 진출했다.

 


복녀 마리아 레오니아 파라디스


폴란드 공산주의 시절 순교한 사제
미하우 라파츠 신부는 1904년 9월 14일 폴란드 텐친에서 태어났다. 1926년 크라쿠프 신학교에 입학해 5년 후 사제 서품을 받았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본당의 보좌 신부로 프워키에 파견된 그는 라츠차에서 사목 활동을 하다가 1937년 본당 주임으로 다시 프워키로 돌아왔다. 독일의 폴란드 점령 이후 가톨릭 본당 및 기관의 모든 행사와 오후 활동을 비롯해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폴란드인-독일인 혼인이 전면 금지됨에 따라 사목 활동도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폴란드에서는 스탈린의 소련 통치하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됐고, 이에 따라 스탈린은 종교와 교회에 대한 전쟁을 대대적으로 선포했다. 1946년 5월 11일 밤, 한 무리의 무장괴한들이 프워키의 사제관에 침입해 미하우 신부를 납치한 후 인근 숲에서 살해했다. 위험을 감지했지만 그리스도와 교회에 충실하기 위해 위기 상황에 기꺼이 직면해 목숨을 바쳤던 그는 정권이 반대하는 사목 활동 때문에 피살됐지만, 이 피살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교회와 교회의 주요 인사들의 영향력으로부터 폴란드를 “해방”시키려는 정부 활동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순교자 미하우 라파츠 신부


아르메니아 국민의 편에 선 수도자 
튀르키예 에르제룸 출신 치릴로 요한 조라비안 수사는 유머와 겸손, 봉사정신, 투철한 정의감이 특징인 팔방미인이었다. 1881년 6월 25일 가난하고 독실한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은 훗날 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 당시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4년 이스탄불의 카푸친 수도회에 입회했다. 사제 서품을 받고 10년 뒤 에르제룸의 트레비존드 선교지로 파견돼 사목 활동과 영성 지도, 교육, 병자 돌봄에 헌신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시 이스탄불에 있던 그는 선교지로 돌아가지 못하고 성 루이지 수도원에 정착했다. 전쟁이 끝난 후 대량 학살로 고아가 된 수백 명의 아르메니아 소녀들을 보살폈으며, 1920년 트레비존드에서 고향에서 쫓겨난 폰투스 지역 그리스인들이 교회와 수도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런 행보로 도시에서 쫓겨났다가 체포돼 이스탄불로 이송됐다. 3일 동안 고문을 당한 그는 누명을 쓰고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풀려나 튀르키예에서 추방됐다. 그리스에 도착한 이래로 수천 명의 아르메니아 난민을 돌봤다. 이탈리아 팔레르모의 카푸친 수도회에 합류한 뒤 1938년 11월 21일 시리아 알타 게지라 총대주교 대리로 임명됐고, 1940년 6월 8일 아실리센의 명의 주교로 임명됐다. 그러나 그의 활동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 그리스 당국은 그를 감시하고 그리스 입국 및 체류 비자를 거부할 정도로 사도직 수행을 방해했다. 그렇게 시리아에 도착한 그는 학교와 성당, 사제들을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 수많은 학생들에게 개인 교습을 하는 등 활발한 사목 및 자선 활동을 펼쳤다. 이후 건강 문제로 알타 게지라 주교직에서 물러나 로마에 정착해 아르메니아인들을 위한 자선 및 사도직 활동을 이어갔다. 1972년 9월 20일 선종했다.

 


가경자 치릴로 요한 조라비안


프란치스코회 정신으로 살았던 군인 
영웅적인 덕행을 인정받은 또 다른 카푸친 수도자 지안프랑코 마리아 치티는 1921년 5월 6일 이탈리아 북부 노바라 지방의 기네세에서 태어났으며, 마리아 신심과 성체 신심이 깊은 훌륭한 신앙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프란치스코회 생활과 영성에 매료됐지만 군생활을 시작했다. 1942년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전선에 파견된 후 러시아 전선에 자원하고 돈 강 전투에 참전해 부상을 입었지만 러시아로부터 극적인 탈출을 감행했다. 1943년 9월 8일 이후 비극적인 전쟁과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파시스트 이념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지지했다. 유다인과 게릴라 부대원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훗날 체포됐다가 석방된 후 다시 군에 입대했다. 군복무를 수행하는 동안 항상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그는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 아낌없이 자선 활동을 펼쳤으며, 적에 대한 존중과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는 이들에 대한 자비를 보였고, 사랑과 용서에 열려 있었으며, 죽어가는 군인들을 위한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950년 소말리아에서 이탈리아 군 선교에 자원한 그는 4년 후 이탈리아로 돌아와 1978년 은퇴할 때까지 군생활을 이어갔다. 마침내 그는 카푸친 작은형제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하고 카푸친 작은형제회의 리에티 수도원에 입회했다. 1982년 9월 12일 사제 서품을 받고 수련생들을 돌보다 사르데냐 보병 전국 연합회(National Association of Grenadiers of Sardinia)의 영성지도 신부가 됐다. 이후 오르비에토 수도원을 복원하는 임무를 맡게 됐는데, 덕분에 오르비에토 수도원은 평화와 기도의 공간을 찾는 사람들을 맞아들이는 곳이자 준거점이 됐다. 그는 교통사고로 2004년 11월 20일 로마의 셀리오 군병원에서 선종했다.

 


가경자 지안프랑코 마리아 치티


어린이와 가난한 이들 곁에 있는 사제 
스페인 출신 세바스티안 길리 비베스는 1811년 1월 16일 마요르카의 지방 자치단체인 아르타에서 태어났다. 1835년 이비자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특히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해 헌신했으며, 이러한 감수성 덕분에 250-500명의 어린이를 돌보는 어린이집 원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아이들에게 더 나은 보살핌을 제공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노 도움의 딸 수녀회를 설립했고, 1860년 팔마병원의 원장으로 임명됐다. 특히 1865년 심각한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신부와 신도들이 극빈층을 돕는 데 이바지한 공로로 두각을 나타냈다. 기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당시 많은 차별을 받던 여성들의 처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1883년부터 팔마 데 마요르카 대성당의 의전사제로서 예수 성심 신심을 특별한 방식으로 장려했으며, 무엇보다도 “40시간 성체 현시 기도”(Quarantore) 신심을 장려하는 동시에 수도회에 대한 헌신을 이어나갔다. 건강 악화로 수녀회 장상직이자 원장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는 1894년 9월 11일 83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가경자 세바스티안 길리 비베스


기도로 보낸 삶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막달레나 로사 볼파토 수녀는 1918년 7월 24일 이탈리아 베네토주 트레비소 지방의 산알베르토 디 제로 브랑코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절부터 수도 성소를 느꼈다. 두 수도회에서 경험을 쌓은 후 평신도 봉헌자로 살다가 1943년 교회의 딸 수녀원에 입회했다. 1945년 1월 18일, 8일 동안 거행되는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이 시작될 무렵 “갈라진 형제자매들의 일치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고 주님께 서원했다. 7일 후인 1월 25일, 그녀는 흔히 결핵성 척추염이라고 불리는 포트병으로 인해 다섯 번째 경추에 골화성 농양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병상 생활을 시작했다. 베네치아 리도 병원에 입원한 그녀는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모범적으로 평온하게 견디며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1945년 5월 18일, 그녀는 수도 서원을 할 수 있었지만, 1년여 후인 1946년 5월 28일 2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된 소박한 삶이었다. 특히 동정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에게 봉헌된 그녀의 성덕은 선종 이후 많은 기적들과 함께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가경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막달레나 수녀


번역 박수현

 

원문 : https://www.vaticannews.va/ko/pope/news/2024-01/chiesa-santi-papa-martirio-sacerdote-polacco-regime-comunista.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