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요나서를 떠올리신 것이 인상적입니다. 요나서는 그 어떤 성경책보다도 동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2,1)고 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물고기의 불편함입니다. 커다란 개체가, 그것도 살아 있는 채로 내 배 속에 들어와 있다고 상상하면 머리가 쭈뼛쭈뼛 섭니다. 니네베를 향해 외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바다로 달아난 요나의 죄는 결국 물고기에게 큰 고통을 안겨 줍니다. 곧이어 요나의 예언을 듣고 회개한 니네베의 임금은 명령합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것도 맛보지 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3,7-8) 사람의 죄가 무엇이기에 짐승까지도 단식해야 할까요? 왜 짐승도 함께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부르짖어야 할까요? 인간의 죄의 결과는 자신의 운명만을 걸고 넘어지는 게 아니라 피조물 전체를 집어 삼킨다는 것, 요나서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으로 돌아옵니다. 바리사이들은 표징을 보고 싶어합니다. 마음속 깊이 숨어 있던 ‘승리주의’에 대한 의식이 표출됩니다. 우리는 선택된 민족이고, 우리의 믿음 체계는 다른 어떤 종교문화 체계보다도 뛰어나며, 그래서 표징이 일어난다면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큰’ 생각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진정성은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 볼 수 있는 감수성, 내 가까이 살아 있는 존재를 하느님의 손길이 깃든 것으로 볼 수 있는 바로 그 ‘작은’ 감수성에 있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