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협은 상처를 줄이고 갈등을 봉합하여 현실을 살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여겨집니다. 타협의 부드러움은 필요합니다. 만약 물러서지 않고 부러지기만 하면 함께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자리에서 타협은 위험한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이 정도는 괜찮을거야.’라고 생각했던 타협이 지속되면 양심은 처음에는 불편해하지만 반복될수록 침묵하는 법을 배우게 되지요. 신앙 자체가 흔들리는 불상사가 벌어집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외로웠습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진리를 붙잡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불편했고 때로는 목숨을 내놓어야 할 정도로 위험했습니다. 그들은 불편함을 통해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타협의 부드러움은 편안하지만 신앙을 깊어지게 이끌어 주는 것에는 의문부호가 따라옵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목숨으로 번역되는 ‘프쉬케’는 육체적 생명이나 호흡과 더불어 정신이나 마음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신명 6,5) 살아가라 요청하십니다. 타협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자임을 선언하신 것이지요. 신앙이 타협을 경계하는 이유는 하느님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타협이 익숙해지기 전에 용기있게 멈춰 설 줄 아는 신앙인이 되길 다짐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