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하느님이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부모와 자식에 대한 사랑을 후순위로 미루라고 하십니다. 단호한 어조로 발설된 이 예상치 못한 말씀에 고정된 사고와 삶의 방식이 흔들립니다. 마치 그동안 쉬운 평화, 쉬운 사랑만 누리려 하지 않았느냐고 질문하시는 듯합니다. 먼저 평화에 대해 성찰해 봅니다. 혹시 나는 ‘편안하다’는 말을 평화로 착각하지 않았었는지. 『마음사전』에서 김소연 시인이 표현하듯, 편안하다는 말은 “편리하고 안전하다”, “모든 것이 손끝에 있고 모든 것이 입안의 혀와 같다”는 뜻입니다. “나의 편안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대가로 치른다”는 시인의 말에서 ‘편안함’은 끝내 ‘평화’와 동의어가 될 수 없음이 드러납니다. 오히려 평화는 ‘평안함’을 전제로 하는데, 그것은 마치 성 프란치스코가 기도했듯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가져오는 자 되기를 바라고,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는 자 되기를 바라는 것이며, 그렇게 “누군가와 함께 누리는 공동의 가치”로서의 평안함을 추구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무엇입니다. 다음으로 사랑에 대해서도 재고해 봅니다. 혹시 나는 내가 주고 싶은 모양의 사랑을 내 방식대로 주는 걸 사랑이라 착각하지 않았었는지. “예언자를 예언자로”, “의인을 의인으로” 받아들이라는 오늘 말씀처럼, 그가 바라는 모양의 사랑을 그가 바라는 방식대로 주는 것, 그가 더 그일 수 있도록 한 걸음 물러나는 것, 그렇게 내 마음의 십자가를 하나 세우는 것, 그것이 사랑에 가깝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