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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생활

Catholic Life

매일미사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입당송
사도 1,14 참조
제자들은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네. 알렐루야.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파스카 축제를 마치는 저희에게 너그러이 은혜를 베푸시어 저희가 그 신비를 삶으로 증언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바오로는 로마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8,16-20.30-31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
바오로는 자기를 지키는 군사 한 사람과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7 사흘 뒤에 바오로는 그곳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모이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백성이나 조상 전래의 관습을 거스르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되어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18 로마인들은 나를 신문하고 나서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나를 풀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19 그러나 유다인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나는 내 민족을 고발할 뜻이 없는데도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였습니다.
20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30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31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10),4.5와 7(◎ 7ㄴ 참조)
◎ 주님, 올곧은 이는 당신 얼굴 뵈오리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은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하늘에 있는 주님의 옥좌에서, 당신 눈으로 살피시고, 당신 눈동자로 사람들을 가려내신다. ◎
○ 주님은 의인도 악인도 가려내시고, 그분의 얼은 폭행을 즐기는 자를 미워하신다. 의로우신 주님은 의로운 일을 사랑하시니, 올곧은 이는 그분 얼굴 뵈오리라. ◎
  복음 환호송
요한 16,7.13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리니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리라.
◎ 알렐루야.
  복음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20-25
그때에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 묵상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요한의 생애가 어떻게 될지 물어보자 예수님께서 남기신 대답입니다. 이 질문과 대답은 예수님이 떠나신 후 두 제자의 삶을 모두 예견하고 있는 듯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의 첫 번째 반석, 즉 초대 교황이 되었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 사도는 오랜 시간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많은 증언을 후대에게 남기게 됩니다. 또한 죽을 때까지 성모님을 모시고 살아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두 분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교회 안의 역할의 다양성과 그 고유한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마다 자기만의 재능이나 성향이 있습니다. 주어지는 역할과 상황 역시 다양합니다. 무엇이 더 좋은지, 혹은 더 중요한지를 따질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맥락에 얼마나 충실한지가 관건입니다. 비교하거나 질투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위치를 존중하고 자신의 삶에서 충만한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베드로의 역할과 요한의 역할이 모두 필요합니다.
  예물 기도
주님, 성령을 보내시어 저희 죄를 모두 용서하시고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거룩한 신비를 합당히 거행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또는>

<주님 승천 감사송 1 : 승천의 신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광의 임금님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로서 (오늘) 천사들이 우러러보는 가운데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으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 세상의 심판자, 하늘과 땅의 주님이 되셨나이다.
저희 머리요 으뜸으로 앞서가심은 비천한 인간의 신분을 떠나시려 함이 아니라 당신 지체인 저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 하심이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6,1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성령이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리라. 나에게서 받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성사로 저희가 옛 계약에서 새 계약으로 건너갔으니 저희의 기도를 자비로이 들으시어 옛 악습을 버리고 거룩한 마음으로 새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요한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은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두 사도를 보여 줍니다. 그 둘은 주님께서 자주 함께하셨고 주님 승천 뒤에도 자주 함께 움직이던 제자들입니다(사도 3―4장 참조). 마지막 만찬 때는 요한을 시켜 주님께 여쭈었던 베드로(요한 13,23-25 참조)가 이제는 자신이 직접 주님께 여쭙고 요한은 침묵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요한이 살아 있기를 바라실 만큼 주님께 그는 각별한 존재였을까요? 그런데 그가 죽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근거 없는 추측이라고 요한 스스로 딱 잘라 말합니다. 실제로 요한은 사도들 가운데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주님 승천 뒤 칠십여 년을 더 살다가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오늘 복음의 구절이 신앙인의 삶에서 보이는 두 가지 모습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곧 베드로는 지상의 시간에 남아 있는 삶을, 요한은 영원한 하늘 거처에 사는 삶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요한 복음 강해』 참조). 다시 말하여 베드로는 순교의 길로 주님을 따르도록 불렸고, 요한은 높은 곳에서 말씀의 신비를 꿰뚫는 관상이 완전해지도록 당신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설교집』 참조).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 베드로에게 중대한 사명을 부여하시고 그를 새롭게 부르셨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을 새롭게 부르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21,22)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마땅히 고통이 따르겠지만 저마다 가는 길은 다르니, 남의 사정을 깊이 알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길에 충실해야 합니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