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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생활

Catholic Life

매일미사
[백]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알로이시오 곤자가 성인은 1568년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귀족 사회의 폭력과 방종에 실망하고 선교사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다. 그리하여 열일곱 살 때 재산 상속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 채 로마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성인은 1591년 로마 전역에 흑사병이 번졌을 때 그 환자들을 정성껏 돌보다가 감염되어, 스물셋의 젊은 나이에 신학생 신분으로 선종하였다. 1726년 베네딕토 13세 교황께서는 그를 시성하시며 청소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셨다.
  입당송
시편 24(23),4.3 참조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주님의 산에 오르고, 그 거룩한 곳에 서리라.
  본기도
천상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 복된 알로이시오가 놀라운 정결과 참회의 정신으로 살아가게 하셨으니 그의 공덕과 전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그 정결과 참회의 정신을 충실히 본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나는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12,1-10
형제 여러분, 1 이로울 것이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예 주님께서 보여 주신 환시와 계시까지 말하렵니다.
2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어떤 사람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은 열네 해 전에 셋째 하늘까지 들어 올려진 일이 있습니다.
나로서는 몸째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고
몸을 떠나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3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나로서는 몸째 그리되었는지 몸을 떠나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4 낙원까지 들어 올려진 그는 발설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은 어떠한 인간도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5 이런 사람에 대해서라면 내가 자랑하겠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내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으렵니다.
6 내가 설사 자랑하고 싶어 하더라도,
진실을 말할 터이므로 어리석은 꼴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랑은 그만두겠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서 보고 듣는 것 이상으로
나를 생각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7 그 계시들이 엄청난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4(33),8-9.10-11.12-13(◎ 9ㄱ)
◎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
○ 주님을 경외하여라, 주님의 성도들아.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 ◎
○ 아이들아, 어서 와 내 말을 들어라. 주님 경외를 가르쳐 주리라. 삶을 즐기고 복을 누리려, 장수를 바라는 이 누구인가? ◎
  복음 환호송
2코린 8,9 참조
◎ 알렐루야.
○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
◎ 알렐루야.
  복음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24-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요한 5,1-5)와 복음(마태 22,34-40)을 봉독할 수 있다.>
  복음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재물의 유혹에 대해 경고하고 계십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재물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먹을 음식이 필요하고, 입을 옷이 필요하고, 또 거주할 공간 역시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강조하시려는 것은 재물에 대한 “끝없는” 유혹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재물에 대한 유혹은 정말 끝이 없습니다. 하나를 가지면 또 다른 것을 가지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것보다는 가지지 못한 것이 더 눈에 들어옵니다. 나보다 덜 가진 사람보다는 나보다 더 가진 사람들이 유독 더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혹에 계속 얽매이게 되면 감사하는 마음을 잃게 됩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기 힘들어지니,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고 만족하기가 어려워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를 충만하게 느끼고 맛보기가 힘들어집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렇게 되뇌이는 모습 속에서는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진정한 행복을 찾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예물 기도
주님, 저희가 복된 알로이시오를 본받아 언제나 깨끗한 예복을 입고 천상 잔치에 참여하여 주님의 은총을 풍부히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78(77),24-25 참조
주님은 하늘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네. 천사들의 빵을 사람이 먹었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사의 양식을 받아 먹었으니 깨끗한 삶으로 주님을 받들어 섬기며 오늘 공경하는 복된 알로이시오를 본받아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걱정 자체가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음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크고 작은 걱정들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섭리’에 대한 신뢰를 가르치시면서 우리를 이런 무의미한 걱정에서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하늘의 새들, 들에 핀 나리꽃들, 그것들을 사랑스럽게 돌보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만들어 내는 목가적인 분위기의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날마다 신경 쓰는 일들, 곧 먹고 마시고 입을 것들에 대한 염려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세상의 현실은 오늘도 전쟁과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이들의 모습을 우리 눈앞에 들이밀며 이 말씀에 도전합니다. 어찌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토록 소중히 여기시는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받지 못한 채 죽어 가게 내버려두실까요? 이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분노 어린 물음만이 아니라 우리 신앙인도 진지하게 마주해야 하는 물음입니다. 그에 대한 답은 어쩌면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마태 6,33)을 찾는 일에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드러내야 하는 나라이고, 그 나라의 바탕이 되는 ‘그분의 의로움’은 형제들을 돌보는 일도 포함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실존적 문제나 고통에 직접 개입하시기보다 당신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에게 형제들의 목숨을 지키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줄 책임을 맡기십니다. 오늘 복음은 아버지의 섭리에만 의지하여 태평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다른 자녀들인 형제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필요한 수고를 하도록 요구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섭리의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길입니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