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베네딕토 성인은 480년 무렵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수비아코에서 삼 년 동안 고행과 기도의 은수 생활을 하였다. 그의 성덕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베네딕토는 마침내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 규칙』을 썼다. 이 규칙이 널리 전파되어 ‘서방 수도회의 시조’라고 불리게 되었다. 성인은 547년 무렵 몬테카시노에서 선종하였다고 전해지며, 8세기 말부터 여러 지방에서 7월 11일에 그를 기념하며 공경해 왔다.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 그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셨다.
입당송
베네딕토는 그 이름대로 복을 받아 거룩하게 살았네. 그는 가족과 유산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거룩한 수도 생활을 추구하였네.
본기도
하느님, 복된 베네딕토 아빠스를 뛰어난 스승으로 세우시어 하느님을 섬기라 가르치셨으니 저희도 오로지 하느님만을 사랑하며 열린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내가 너의 얼굴을 보았으니,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46,1-7.28-30
그 무렵 1 이스라엘은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그는 브에르 세바에 이르러 자기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다.
2 하느님께서 밤의 환시 중에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부르시자,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3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4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
요셉의 손이 네 눈을 감겨 줄 것이다.”
5 그리하여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났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태워 오라고
파라오가 보낸 수레들에 아버지 야곱과 아이들과 아내들을 태웠다.
6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얻은 가축과 재산을 가지고 이집트로 들어갔다.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이 함께 들어갔다.
7 야곱은 아들과 손자, 딸과 손녀,
곧 그의 모든 자손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들어갔다.
28 이스라엘은 자기보다 앞서 유다를 요셉에게 보내어, 고센으로 오게 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고센 지방에 이르렀다.
29 요셉은 자기 병거를 준비시켜, 아버지 이스라엘을 만나러 고센으로 올라갔다.
요셉은 그를 보자 목을 껴안았다.
목을 껴안은 채 한참 울었다.
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렇게 너의 얼굴을 보고 네가 살아 있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7(36),3-4.18-19.27-28.39-40(◎ 39ㄱ)
◎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네.
○ 주님을 믿으며 좋은 일 하고, 이 땅에 살며 신의를 지켜라.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네 마음이 청하는 대로 주시리라. ◎
○ 주님이 흠 없는 이들의 삶을 아시니, 그들의 소유는 길이길이 남으리라. 환난의 때에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기근이 닥쳐와도 굶주리지 않으리라. ◎
○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너는 길이 살리라. 주님은 올바른 것을 사랑하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 버리지 않으신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받지만, 악인의 자손은 멸망하리라. ◎
○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고, 그분은 어려울 때 피신처가 되신다. 의인들이 주님께 몸을 숨겼으니, 그분은 그들을 도와 구하시고, 악인에게서 빼내 구원하시리라. ◎
복음 환호송
요한 16,13; 14,26
◎ 알렐루야.
○ 진리의 영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끄시어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시리라.
◎ 알렐루야.
복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6-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잠언 2,1-9)와 복음(마태 19,27-29)을 봉독할 수 있다.>
복음 묵상
“끝가지 견디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끝까지 견디는 일과 박해를 피하는 일은 모순된 말처럼 들립니다. 좀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이 두 말씀을 억지로 이어 보려다 멈추고, 마태오 복음사가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마태오는 박해시대의 사도였습니다. 자신이 전한 신앙을 증거하며 죽음을 끌어안은 사람도 보았을 것이고, 또 살기 위해 복음을 포기한 이들도 마주했겠지요. 언젠가 자신이 가르쳐 보낸 제자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그때 자신들을 파견하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 헤아려 보았을까요. 어쩌면 그의 마음속에 박해를 마주하는 두 생각이 함께 들어앉아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박해는 끝이 났지만, 고민은 계속되어야 하겠지요. 오늘날 어떻게 신앙을 살아야 하는지, 또다시 고민을 시작하며, 다시금 복음을 마주해 봅니다.
예물 기도
주님, 복된 베네딕토를 기리며 드리는 이 거룩한 제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그를 본받아 주님만을 찾고 섬기며 주님께서 주시는 일치와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루카 12,42 참조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체성사로 영원한 생명의 보증을 받고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복된 베네딕토의 가르침에 따라 주님을 충실히 섬기며 진심으로 형제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제자들은 앞으로 박해를 겪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나를 증언하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18)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렇게 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고통과 죽음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제자들은 그 순간에 오히려 더욱더 예수님의 제자임을 증명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까요? 그들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그들에게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시고, 해야 할 바를 하도록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하기에 죽음조차도 그들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힘으로만 증언할 수 있기에, 인간의 힘만으로 해 보려는 태도를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걱정한다’는 것은 자기의 지혜와 힘으로 해 보려는 자세이기에 주의해야 합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미리 알려 주시지 않고 증언해야 할 바로 그때에 알려 주시는 것도, 미리 앎으로써 인간이 자기 지혜와 힘을 섞게 되는 것을 막으시려는 의도라고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 박해받을 제자들에게 미리 당부하시는 ‘뱀 같은 슬기’란, 증언이 하느님의 몫이며 우리의 몫은 온전히 그분께 의탁하는 것임을 아는 것인 듯합니다. 그리고 ‘비둘기 같은 순박함’은, 순박함이라는 단어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함과 외곬, 단순함을 뜻한다는 점에서 오직 하느님과 그분 뜻만을 바라보는 단순한 자세를 일컫는 듯합니다. 하느님과 그분 뜻만을 바라보면서 그분께 의탁하는 자세가 참제자의 모습입니다.
(김태훈 리푸죠 신부)